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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 썰을 참고했습니다.

둥굴레차!

그 언젠가

14.09.13







이따금, 가람은 본인은 모습이 지독하게도 낯설어지는 날이 있다. 가만히 마루 끝에 서서 눈이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날, 얇은 문 너머로 쏟아지는 햇볕을 바라보다 이불을 잡아끌며 억지로 눈을 감던 날, 그리고 길을 걷다 문득, 제대로 된 빛이라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골목 앞에 멈춰서 그걸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는 제 모습이 그랬다. 





가람이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이었다. 아버지가 하늘나라에서 내려오시던 날, 아침에 저를 ‘엄마’라고 부르라던 여자에게 받았던 용돈으로 아이스크림을 사가던 날이었다. 먹고 싶은 걸 먹으라던 그 말에, 세 개만 사오면 돼? 하고 묻던 가람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가람의 어깨엔 아직도 여자의 따스함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 내려쬐는 햇살에 행여나 아이스크림이 녹아버리진 않을까 품안에 아이스크림이 담긴 봉지를 꼭 안고 종종걸음으로 뛰던 날이었다. 길을 가던 가람의 어깨를 가만히 붙들면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아저씨가 이 동네가 처음이라 그런데, 혹시 교회가 어느 방향인지 아니?”


따습던 봄의 날씨엔 어울리지 않게, 새까만 재킷을 걸친 남자였다. 꾹 눌러 쓴 모자 아래로 그림자가 져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왜인지 무척이나 인상이 선한 사람이었다. 가람은 음, 어…하며 말꼬리를 흐리며 한참동안 주위를 둘러보며 길을 찾다가 제 품에 안긴 아이스크림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뭔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제가 알려드릴게요.”


가람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의 손끝을 잡았다. 남자의 입가에 비린 미소가 걸린 것도 보지 못했다. 아니, 봤다고 하더라도 그런 걸 알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여서, 일곱 살 쯤 되었을까. 남자는 속으로 가람의 나이를 가늠하며 가람의 손끝을 고쳐 쥐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동네가 한산했다. 차가 지나다니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언제나처럼 느린 걸음으로 동네를 걷던 노인들도 보이지 않았다. 학생들은 모두 학교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어른들 또한 제 할 일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던 때였다. 
교회로 가는 길엔 셀 수도 없이 많은 골목이 있었다. 골목골목으로 길이 이어진 터라 반대편이 아예 막힌 곳은 손에 꼽힐 정도였지만, 남자는 놀랍게도 그런 골목을 찾아냈다. 아, 저기! 하고 가람이 교회의 십자가를 손으로 가리키는데, 남자는 얼른 주위를 살피며 가람의 입을 틀어막았다. 
제가 해야 할 일을 알고, 할아버지에게 무술을 배운 지 고작 한 달이 채 되지 않던 때였다. 인간들과 태생이 다르고, 타고난 힘이 다르다고는 하나, 성인 남자에게 있어서는 고작 어린애에 불과했다. 입을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아무런 말도 새어나가지 않았다. 목이 터지도록 소리를 질렀는데, 거리는 조용하기만 했다. 
반대편이 아예 막힌 골목은 다소 짧았지만, 키가 큰 빌라들에 막혀 아무런 빛도 들어오지 않았고,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버린 건지 쓰레기가 썩는 역겨운 냄새가 났다. 남자는 곧장 가람을 넘어뜨렸다. 그 행동엔 일절의 미련이나 망설임 따위는 없어보였다. 남자는 가람의 입을 틀어막은 손을 떼지 않고,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아저씬 나쁜 사람 아니야.”


그리고 이어지는 징그러운 웃음소리에, 가람의 목에 소름이 돋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품에 안고 있던 아이스크림은 골목의 끝에 널브러진 채 녹고 있었다. 가람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남자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니까짓게 저항하면 얼마나 한다고. 소름끼치는 남자의 말에 가람은 그만 울음이 났다. 남자의 입술이 가람의 귓불에 닿았다. 잘근잘근 귓불에 희미한 자국을 내며, 남자는 계속해서 웃음소리를 내었다. 가람은 어떻게든 남자를 떼어내려 했다. 그 조그마한 발로 남자의 배를 차고, 손으로 남자의 목이니 눈이니 하는 것들을 막으려 애를 썼다. 처음엔 웃으며 넘기던 남자의 얼굴에 섬뜩한 표정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아까까지의 상냥한 얼굴은 어디로 가고 핏기가 싹 가시는 냉정한 얼굴로 변해, 가람은 그만 숨이 멎을 뻔했다. 남자는 계속해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발, 이 씨발…, 조그만 새끼가. 남자는 그 큰 손으로 가람의 얼굴을 몇 번이나 내리쳤다. 주먹으로 뺨을 때리고, 머리를 후려치기도 했다. 계속해서 저항하자, 죽이기라도 할 듯 가람의 멱살을 잡더니 바로 옆의 벽에 수차례 머리를 박기도 했다. 이마가 찢어져 핏방울이 맺히고, 눈꺼풀 아래로 떨어졌다. 뺨엔 수많은 생채기가 생겼고, 금방 숨이 넘어가도 별반 이상할 것은 없는 것 같았다. 가람은 더 이상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무어라 소리라도 치려 입을 벌리면, 남자는 곧장 조용히 해, 하고 목을 짓눌렀다. 
가람은 힘없이 쓰러졌다. 더 이상 제 목을 조르는 남자의 손을 밀어낼 힘조차 없었고, 아무 소리도 뱉을 수 없었다. 남자는 그제야 만족한 듯 징그러운 미소를 띠더니, 천천히 가람의 티셔츠를 말아 올렸다. 가람의 눈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간간히 남자의 등 뒤로 보이던 해도 구름인지 건물인지에 완전히 가려졌다. 남자는 웃음을 흘리며, 조그마한 소리로 속삭였다. 


“나쁜 짓 하는 거 아니야, 니가 너무 예뻐서 그래.”


그러니까, 잠깐만 있어봐. 흐린 눈으로 가람은 푹 눌러쓴 모자 아래의 얼굴을 보았다. 비열한 미소가 서린 얼굴이었다. 역겨워. 가람은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아까는 어째서 이 얼굴이 그렇게 선해보였는지도 모르겠다. 흐르는 핏방울이나 눈물 때문인지 괜히 시야가 흐렸다. 제 위에 올라탄 남자가 보였다. 그의 숨소리는 이미 거칠어져 있었다, 마치 짐승같이. 가람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제대로 주변을 살폈다. 쓰레기가 썩는 냄새는 나는데, 왜인지 쓰레기 같은 건 떨어져 있지 않았다. 가람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축축한 흙바닥이 있었고, 골목이 좁은 탓인지 금방 한 쪽 손에 벽이 닿았다. 가람은 가까워져오는 남자의 얼굴에 겨우겨우 고개를 빼며, 옅은 신음을 뱉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빛이 보였다. 골목의 끝에서, 빛을 등지고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시야도 흐릿하고, 빛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 그림자는 분명 제 아버지였다. 뒷짐을 진 채 선 그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가람의 얼굴엔 다신 없을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안도감과, 반가움이 뒤섞인 아주 예쁜 웃음이었다. 죽어버린 눈에도 희미한 빛이 돌아왔다. 아빠. 가람이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그렇게 소리쳤다. 속으로 수도 없이 부르고, 바라던 사람이었다. 아빠, 아빠. 제대로 떨어지지도 않는 입모양으로 겨우겨우 불러대었는데, 그 그림자는 가만히 등을 돌렸다. 가람은, 알 수 없는 절망에 무슨 말을 뱉어낼 수조차 없었다. 무언가가 확 꺼져버렸고, 허무함이 밀려왔다. 일순 빛을 되찾았던 눈 또한 다시 빛을 잃었다. 가람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으, 으 하는 알 수 없는 신음을 뱉을 뿐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변에 집히는 무언가가 있다면,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면, 남자가 잠깐이라도 손을 놓아준다면, 아빠가, 도와주기라도 한다면. 그 오만가지의 생각 중에 단 하나만이라도 들어맞으면 분명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일말의 희망은 삽시간에 사라지자 왈칵, 울음이 터졌다. 어떻게든 뻗어보려 노력하던 손도 힘없이 떨어졌다. 
남자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프게 하진 않을게. 남자는 그렇게 속삭이며 가람의 바지춤을 쥐었다. 바지춤이 가람의 발끝에 걸렸고, 남자가 가람의 목덜미에 입을 가져다댄 차였다. 맨살에 훅 차가운 바람이 닿고, 가람은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제 위에 올라탄 짐승이 보였고, 머리끝까지 소름이 끼치며, 가람은 부르튼 입술을 꾹 깨물며 아무렇게나 손을 뻗었다. 손끝에 이상한 감촉이 느껴지며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귀를 찢는 듯한 비명소리였다. 남자는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가람은 얼른 바닥을 살폈다. 남자의 발밑에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보였다. 가람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성보다 본능이 한참을 앞섰다. 살아야겠다.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저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가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가람은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제 주먹만 한 돌덩이를 쥐고, 가람은 몇 번이나 남자의 머리에 내리쳤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두 손이 덜덜 떨렸고, 남자는 제 뒤통수를 움켜쥔 채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가람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남자는 히익, 하고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떨었다. 미안하다, 내가 잠깐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잘못했다. 남자는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오직 그 말만을 반복했다. 아까의 그 비열한 웃음소리도, 소름끼치는 모습도 없다. 남자는 꼬리를 내린 채, 살고자 발버둥치고 있었다. 가람은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게나 소리를 쳤음에도 거리엔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골목의 끝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채 버려진 아이스크림 봉지가 보였다. 가람은 덜덜 떨리는 제 손바닥을 가만히 살폈다. 진득한 피로 범벅이 된 손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다, 가람은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골목 밖으로 도망쳤다. 
어둡고, 역겨운 냄새가 나던 골목과 다르게, 거리는 온통 환한 빛에 감싸인 채였다. 아주 먼 데에서 경적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담장 위로 고양이 한 마리가 걸어가며 가람을 내려다보았다. 느린 속도로 바로 옆을 지나가는 오토바이에서는, TV에서 수도 없이 틀어주던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골목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끔찍한 무언가가 그림자에서부터 기어 나와 가람에게로 손짓하고 있었다. 역겨운 냄새가 나서, 가람은 얼른 집으로 돌아갔다.





“가람아!”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왔니, 하는 다정한 목소리를 내던 여자는, 덕지덕지 피가 묻고 상처가 난 가람의 모습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자는 가람을 와락 끌어안고 한참이나 등이며 머리를 어루만져주더니, 가람의 양 어깨를 꽉 붙들고 거듭해서 물었다.


“어디서 다쳤어? 누구한테 맞았니? 어쩌다가 이렇게 다쳤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여자의 말은, 온통 걱정과 슬픔으로 얼룩졌다. 가람은 멍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다, 찬찬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넘어졌어…”


그거 뿐 이야. 가람은 갈라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제 어깨를 잡은 여자의 팔을 떼어냈다. 한 마디만 더 했다간 여자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가람은 연신 괜찮아, 별로 안 아파, 하고 중얼거리며 여자를 달랬다. 여자는 괜찮다는 가람의 말을 쉬이 믿어주지 않았다. 가람을 끌어안고 많이 아팠을 텐데…, 하고 제가 대신 다쳐주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듯 했다. 가람은 여자의 품에 안겨 대체 누가 누굴 위로해주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여자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하려 잠깐 고개를 들었을 때,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는 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잠깐 가람을 바라보는 듯 싶더니, 찻잔을 내려놓으며 턱을 괴었다. 
가람은 멍하니 그걸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까의 그 그림자와, 지독하게 닮았다. 큰 키도, 시선이 마주친 붉은 눈동자도. 아빠, 혹시 아까 나갔었어요? 가람은 조그마한 소리로 그를 부르려다, 곧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침과 똑같은 머리에, 똑같은 옷에,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갔더라면 무언가 달라진 것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가람은 여자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다시는 안 다칠게요. 응?”


애교를 부리듯 끝을 살짝 올린 가람의 말에, 여자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와, 약 발라줄게. 여자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가 상처를 소독하는 중에도, 가람은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엄마.”
“왜 그래, 가람아?”


여자는 가람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가람은 어쩌면 바보 같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아빠는, 날 사랑하죠?”


하고 물었다. 여자는 환히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빠가 얼마나 가람이한테 관심이 많은데. 가람이 너 그 사진 기억나니? 도장 앞에서 엄마랑 같이 찍었던 사진 있잖아. 오늘도 가람이 네 사진을 보면서 많이 변했다고 했는걸. 아빠는 가람이를 너무너무 사랑하는데, 표현이 서투신 것 뿐 이야.”


여자는 마지막으로 가람의 이마에 밴드를 붙이며 자, 다 됐다. 하고 말하며 웃었다. 고마워요. 가람은 조그맣게 속삭이며 여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다시는 안 다칠게요. 제 자신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며, 가람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빠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서 헛 걸 본 것일 뿐이다. 아빠는 나를 그렇게나 사랑하는데. 





“가람아, 무슨 생각해?”


은찬이 가람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넸다. 가람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아, 어…, 하고 반쯤 모자란 대답을 했다. 가람아, 오늘 저녁은 고기 말고 다른 거 먹자. 한참을 앞서나가던 은찬이 홱 가람의 쪽으로 몸을 틀며 소리쳤다. 그 말에 가람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쉬이 골목의 앞에서 걸음을 떼지 못했다. 마치 무언가가 발목을 그러쥐고 있는 듯,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람은, 눈을 꾹 감았다 뜨며 고개를 저었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역겨운 기억이야.”


가람은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은찬의 뒤를 쫓았다. 사람도 없이 한적한 도로가, 노을에 젖어 주황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