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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의 낙찌님(@dungcha_zzi)의 사방신 썰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낙찌님 감사합니다.

둥굴레차!

백건X청가람

돌지 않는 계절의 끝

18.11.06









  온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가람이 잠들어 있는 온실은, 입구에서부터 진하게 꽃내음이 나고는 해서, 은찬은 그 곳을 제일로 좋아했다.



  "맨날 다른 데에서 잠이 드니까 찾기가 쉽지 않네."



  은찬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번 해의 가람은 벚나무도 무엇도 없는 한 구석에 있었다. 은찬은 그 앞에 앉아 입을 떼었다. 청룡은 잠이 드셨는데요. 온실 앞에 선 은찬에게 그리 말하던 신령은 오늘도 은찬의 뒤를 쫓아다니며 그 이야기만 반복했다. 그냥 얼굴만 보러 온 거야. 매번 얘기해주지 않아도 돼. 은찬은 몇 번이나 반복되는 말에, 지지않고 대답했으나, 신령은 잠깐 입을 다무는가 싶더니 다시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청룡이 잠들었다는 걸 모를 정도로 내가 멍청해 보여? 기어이 짜증이 섞인 투로 대답하자, 신령은 잠시 머뭇거리곤 자리를 피했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그렇지? 가람은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쓴 채였어서, 얼굴을 보려면 이불을 조금 들춰내야 했다. 은찬은 가만히 앉아 가람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죽어도 오르지 않을 거라며 바득바득 우겨대던 얼굴이 선명했다. 백건은 애써 가람의 화가 누그러질 적마다 성질을 긁고는 해서, 그 때마다 가람의 비위를 맞춰주는 은찬만이 죽을 맛이었다. 어차피 너도 사신이 될 걸. 어쩔 수 없이 하늘에 오를 거잖아. 어린애처럼 떼 쓰는 건 그만하지, 청룡. 백건은 언제나 다 안다는 듯, 네가 어쩔 방도가 있겠냐는 식으로 이야기하고는 했다. 가람은 그 때마다 입술을 짓이겼는데, 이따금 다 늦은 새벽녘 대련장 한 구석에서 가람이 숨죽여 울었다는 걸, 백건은 아마 모를 거였다. 언젠가였다. 가람아, 울어? 조심스러운 말로 다가선 은찬은, 그 자리에서 벼락을 한 번 맞을 뻔하고, 욕을 진탕 먹고도 위로 한 번 해주지 못한 채 방으로 돌아가야했다. 그 다음 날이면 언제나 그렇듯 맞은 편에 백건을 앉혀놓고서 한참동안 이야기를 했다. 가람이한테 너무 그러지 마, 네가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가람이가 얼마나 힘들겠어. 그 때마다 백건이 뭐라고 했더라. 오지랖 부리지 말라고, 그렇게 대꾸하며 제 방으로 돌아가버리는 식이었다. 괜히 내가 미안하네. 작은 소리로 중얼이며 은찬은 이불 위를 토닥였다. 


  봄이 좀, 짧아졌다나봐. 어차피 들을 수도 없는 말이지만, 은찬은 그 말을 삼켰다. 제가 잠들어 있는 사이 백건이 왔다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온실 연못에 물고기가 뛰어오르는 소리조차 들리지가 않았던 것만은 여실히 기억이 났다. 그러고 나서도 은찬은 아주 한참이나 잠든 가람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 가람을 만났던 때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중앙으로 옮겨지고, 중앙에서의 이야기는 하늘에 오르기 바로 직전의 날까지 이어졌다. 오래토록 혼자 그렇게 중얼이다, 은찬은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멋쩍게 웃었다. 맞아, 너 잘 때 옆에서 얘기하면 시끄럽다고 짜증냈잖아. 그만 가야겠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 얼굴을 본다고 조금 들춰냈던 이불을 다시 머리 끝까지 덮어주고서, 좋은 꿈을 꾸라는 말로 은찬은 온실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상엔 벌써 봄향기가 지워진 후였다.






  온실을 하나하나 돌며, 잠이 든 가람에게, 백건에게, 현우에게 찾아가고 나면, 은찬은 시간을 내 지상엘 갔다오고는 했다. 할머니는 여전한 모습으로 중앙을 지키고 있었고, 매번 마루 밑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멍걸이는 대문 바로 옆에 생긴 새 집에서 얌전히 누워 은찬을 향해 작은 소리로 한 번을 짖고, 멍걸이와는 전혀 닮지 않은 새끼 몇 마리가 은찬의 발치를 스쳐지나가고는 했다. 


  지상에 올 적마다 은찬은 유나비가 사는 동네 근처를 서성였다. 그럴듯하게 지난 시간만큼의 모습을 바꾸었고, 익숙치 않은 지상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늘에서는 휴대폰도 무엇도 필요가 없었으니 약속을 잡을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은찬은 점심에 볕이 쨍할 때부터 그림자가 길어지다못해 어둠에 잠길 적까지 내내 동네 어귀를 돌았다. 그렇게라도, 한 번쯤은 그리운 얼굴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었다.



  "올해도 못 보고 가네."



  벌써, 십 년이 지났는데. 은찬은 입술을 물었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내일 또 비를 내릴 것이었으니, 그만 돌아가야 했다. 하늘은 적당히 어둡고, 불어오는 바람마저 후덥지근했다.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아, 꿈에서도 나비의 얼굴이 흐릿했다. 어차피 다 잊혀질 거라더니, 틀린 말은 아니네. 하늘에 오르기 바로 전 날, 제가 나비에게 건넨 말이었다. 아주 멀리로 이사가. 한국에 못 올 지도 몰라. 안경을 써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말하는 은찬의 눈가는 붉어져있었다. 채 붙들지도 못하고 손이 자꾸만 떨렸다. 금방 잊어버리지는 않겠지만, 최대한 오래 기억 할 거야. 목소리가 자꾸만 기어들어갔다. 은찬의 말에 항상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던 유나비도, 그 날만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둘은 카페 한 구석에 아주 오랫동안을 앉아있었고, 서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은찬은 나비의 눈을 쳐다도 보지 못한 채로,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만을 수십 번 곱씹다 도망치듯 중앙으로 돌아갔다.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못한 게 못내 후회로 남았다. 유나비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테니까. 좋은 사람이었던 유나비는 이미 보란듯이 저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테고, 은찬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 그저 멀리서라도 얼굴 한 번이라도 보고픈 마음이었다. 






  그 해의 여름은 유난히도 길었다. 마치 여름만이 영원히 남을 것처럼. 하루가 멀다하고 비가 내렸고, 수 많은 발자국이 잠겼다. 은찬은 지상에 갔다 온 후로 온실에서 나올 생각을 않았고, 그렇게 계절이 바뀌었다. 은찬은 연못 바로 옆의 나무에 기대어,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죽음을 맞았다.






  백건은 아주 한참을 뒤척였다. 길어져버린 머리를 쓸어넘기며, 숨을 뱉었다. 좋은 아침이야, 백건. 올해도 질리지 않고 은찬이 남기고 간 인사에, 피실 웃음이 샜다. 백건 또한 질리지 않고 가람이 잠든 온실의 문을 두드렸다. 몇 해에 걸쳐 아득아득 우긴 덕에 신령들도 더 이상 백건의 뒤를 쫓으며 같은 말만을 반복하지는 않았는데, 백건은 그게 퍽 마음에 든 눈치였다.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쓴 이불을 들추는 손이 거침이 없었다. 은찬의 장난인지, 가람의 객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잠든 가람의 귓전에는 하얀 꽃이 여즉 붙어있는 나뭇가지가 꽂혀있었다. 숨조차 쉬지 않은 채 잠든 가람의 옆에서, 백건은 아주 오래토록을 머물렀다. 예쁘게 잠들었네, 올해는. 머리칼을 헤집는 손이 다정스러웠다. 청가람. 수없이 곱씹은 이름이 닳아빠질 것 같았다. 잠든 가람을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것은 그리움이고, 부르는 목소리엔 미련이 붙었다. 



  "내가 죽으면 네가 또 깨어나겠지."



  하늘에 오른 그 몇 년이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럴 거였다. 너도, 날 찾아올까. 듣는 이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데, 백건은 머뭇머뭇 말을 뱉어냈다. 야, 청룡. 너는 이름을 부르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했다. 청룡. 그에 답하지 않고 또 이름을 불러내면 날 선 표정으로 휙 돌아보고는 했다. 청룡. 뭔데, 백건. 뚱한 얼굴로 그리 말하는 것마저 좋았다. 물론 네게는 이야기해줄 수 없었지만. 



  "찾아와주면 안 돼?"



  네가 그랬듯, 나도 모르겠지만. 왔다 갔다고, 얘기라도 전해주던가, 빠져나가는 길에 벚꽃잎 하나라도 흘려주던가, 아니면 바로 옆에서 잠들어도 괜찮아. 주은찬이야 놀라서 뭐냐고 물어보겠지만, 현무는 나보다 늦게 깨어나니까 알지도 못 할 거야. 그러니까, 



  "…한 번만, 그래주면 안될까."



  은근하게 뱉어낸 말은 이제 부탁이 되었다. 소원이라고 생각하고…. 백건은 어느새 가람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제발, 청가람, 어? 내가 다 미안해, 지금까지 내가 다 잘못했어. 왈칵 울음이 났다. 백건은 그 와중에도 가람에게 우는 얼굴을 들키기가 싫어 고개를 더 깊이 파묻을 뿐이었다. 


  백건이 온실을 떠난 것은 아주 한참이 지난 후였다. 예쁘게 색이 물든 낙엽 몇 장이 가람의 곁에 남았다. 이불을 다 들춰놓고,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나무를 잔뜩 다 흔들어놓고, 가람의 손등에 울음이 묻은 것도 알지 못한 채로, 백건은 그렇게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그 해 여름이 유난히 길었던 탓일까. 가을이 퍽 짧게도 느껴졌다. 단풍은 금새 물들었고, 바람이 금방 차가워졌다. 지상의 모두는 온기를 찾아 헤매었으며, 백건에게도 죽음이 찾아왔다. 지난 해보다, 몇 주가 짧아진 어느 가을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