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de-image




트위터의 낙찌님(@dungcha_zzi)의 사방신 썰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낙찌님 감사합니다.

둥굴레차!

백건X청가람

돌지 않는 계절의 끝

18.11.07






  어차피 지상에 내내 머무르지도 않을 거, 대체 인간들 사이에 섞여 학교를 왜 다녀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은찬과 같이 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백건은 그리 말하며 시간이 아깝다는 티를 냈다. 할머니도 어차피 사신이 되면 지상에서의 일을 잊는다고 했잖아?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다 잊어버린다고. 이럴 시간에 무술 수련을 하면, 하늘에 더 빨리 오를 수 있을 거야. 너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은찬은 내내 그 말에 웃고만 있다가, 어깨를 두드리며 제 생각을 묻는 백건의 말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하고는 했다.

 


  "그래도 좋지 않아?"

 


  좋은 친구들도 많고, 학교 생활도 재밌잖아. 그러며 저 멀리에서 기다리는 친구들에게 손을 흔드는 은찬의 뒷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더라.


  은찬은 인간 사이에 섞이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운동신경이야 월등할 정도였고, 이상하리만치 제 이야기는 꾹 눌러담아버리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그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다. 종래엔 은찬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고 졸업한 아이들도 잊을만 할 즈음 다시 연락을 해오고는 했다. 잘 지내? 라고 안부를 묻는 말에서 시작한 말들은 모두 그런데 너는 어느 학교로 갔더라, 하고 끝났음에도 은찬은 꼬박꼬박 연락을 이어나갔는데, 백건은 언제나 그걸 바라보며 놀랍다고 박수를 쳐주고나 있었다. 대단하다는 의미였으나, 반쯤은 조롱이었다는 걸, 은찬도 알았다.


  백건은 은찬과는 정 반대였다. 성격이 암만 좋지 않았다고는 하나, 또래의 아이들에게 백건은 일종의 우상이었다. 가문의 비호였을까. 극작가인 아버지와 유명한 배우였던 어머니, 한 번쯤 모든 이의 첫사랑으로 남았을 형제. 굳이 집안이 아니더라도 잘난 얼굴은 남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한 거였다. 항상 주변에 수근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그 주변을 맴도는 발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꾸를 하지 않고 꺼지라고 암만 으르렁대도 포기를 모르고 내내 곁에 머무르던 탓에 인간에게 완벽하게 질려버려서, 백건은 기억하는 것이 많지 않았다. 중학교에 다닐 때에 누나인 백은이 학교엘 찾아온 적이 있었으나, 그 이유는 기억하지 못했다. 저 때문에 집에 큰 소란이 있던 날도 있었으나, 그 이유 또한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나하나 기억하기엔 참으로 사소하고 별 것도 아닌 일들이었다.


  백건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주은찬이 마지막으로 다니던 고등학교에 유난히 애착이 심했다는 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백건은 눈을 감았다. 은찬의 곁에 항상 흐릿한 그림자 하나가 있었는데. 언제는 희뿌얬다가 또 다음에는 보랏빛을 띠기도 했다. 아마, 여자애였던가? 백건은 거기서 그만 생각을 멈췄다. 은근하게 뭉그러진 생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은, 청가람. 그 이름 석 자였다.

 

 

 



  백건은 몸을 일으켰다. 가지의 끝에 걸려 흔들리던 나뭇잎들은, 그 새를 견디지 못하고 죄 떨어져 있었다. 이런 것도 가을인가. 침대 위에 떨어진 낙엽들을 바닥으로 쓸어 내리고, 느린 손으로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백건은 이번 가을에도 가람의 온실에 제일로 먼저 찾아갈 참이었다. 그 옆에 앉아 가람의 얼굴을 뜯어보고, 손을 한 번 쥐어보고, 이름을 몇 번 불러 보고생각이 내내 이어지던 것이 멈춰버렸다. 온실의 앞에 선 그림자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거짓말이지? 문을 밀어내는 손이 들들 떨렸다. 걸음 한 번을 떼는 게 어려워서, 백건은 온실의 문 앞까지 가는 시간이 영겁같았다. 잘 잤어, 백건? 그 새를 못 참고 문 틈으로 반쯤 들어선 얼굴에, 백건은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보통의 인간들은 소원이 이루어지면 뭐라고 이야기했더라. 하늘이 도왔다고,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이루어진다며 꿈을 꾸라고 하지 않았던가. 백건은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들을 적마다 코웃음을 치고는 했지만, 지금은 감사하다고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은찬이, 현우가, 가람이, 꿈에서 깨어났다.


  봄과 가을이 아주 흐릿해져, 여름과 겨울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지조차 희미해진 어느 늦여름이었다.

 




 

  하늘에 오른 지 이십 여 년이 지났으니,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제일로 기뻐했던 것은 은찬이었다. 은찬은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옛날 이야기와, 요즘의 이야기를 다 늘어놓았다. 희미해진 기억 어딘가에 있을 이름들이었다. 백건은 은찬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둘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상은 이미 저들이 모르는 것들로만 가득 찼는데, 하늘에의 그들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현우도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백호공자, 그때 좀 너무하셨습니다. 자는 사람 얼굴에 그렇게 낙서를 해두면 어쩝니까? 제가 먼저 시작한 장난인 걸 기억하지 못했는지, 우스운 표정으로 그리 이야기하는 현우에게, 백건은 오늘만큼은 아주 관대해졌다. 그 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가람 뿐이었는데, 세 명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한 번씩 씩 웃어버리고, 느린 걸음으로 가람이 잠들어있던 온실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두드린 것은 은찬이었다. 연다? 장난이라도 시작되었다는 듯이, 은찬은 조심스런 손으로 문을 열어냈다. 온실의 앞에 선 신령도 오늘만큼은 은찬과 현우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백건은 피어 오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전 날 밤, 산타가 두고 간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 애의 표정과도 비슷했는데, 기대와 기쁨, 그런 게 잔뜩 묻어난 얼굴이었다.

 

  온실에서는 여전한 꽃내음이 났다. 난 여기 좋더라.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서며 은찬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는 좀 별로입니다, 냄새가 독하지 않습니까. 그 뒤를 쫓으며 현무도 한 마디를 거들었다. 자고로 꽃은 향기가 없어도 아름다운 법이라고, 향이 독한 것들은 그토록 아름답지 못해서 그런 거라며 궤변을 늘어놓았는데, 은찬은 익숙하게 웃으며 그런가, 하고 대답했다. 쉬이 걸음을 들이지 못한 것은 백건 뿐이었다. 네가 있을까. 예전과 같은 얼굴로 그 자리에 눈을 감고 있을까.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었다. 제일 앞서 걷던 은찬의 걸음이 멈춘 건, 온실의 가운데에 크게 자라나 있는 벚나무의 앞이었다. 지난 해에는 장난이랍시고, 잠든 가람의 품에 꽃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잔뜩 안겨주었었는데, 가람은 여즉 그걸 끌어안은 채로 잠이 들어있었다.

 


  “가람아,”

 


  언제나와 같은 미소였다. 은찬은 가람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살살 가람의 어깨를 흔들었다. 꽃을 끌어안은 손끝이 움칠이고, 여즉 멍한 얼굴로 가람이 눈을 떴다. 잘 잤어? 여전한 인사에, 여전히 멍청한 얼굴에, 눈을 뜬 가람은 은찬과 현우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청룡공자,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던 겁니까? 제가 가람이 잠든 곳을 찾지 못한 걸 가람의 탓을 해내며, 현우도 웃는 얼굴로 은찬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백건은 멀찍이 서서 그걸 바라보고만 있었다. 가람이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되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정말로 깨어날 줄은 몰랐으니까. 바라고 바라던 이 상황이 올 줄은 몰랐으니까. 미안하다고 하려고 했었나. 아니면 자기를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청룡...

 


  보고, 싶었다고. 그래, 보고 싶었다고, 내내 너를 그리워하기만 했다고.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 죽을 것 같았고, 네 눈을 맞추며 다시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내가 얼마나 너를 그리워했는지를 알고 있느냐고. 부르는 목소리가 답잖게 덜덜 떨렸다. 보고 싶었다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느리게 걸음을 떼었다. 인기척을 느낀 건지, 가람은 고개를 들어 백건과 눈을 맞추었다.

 


  “ 너희는 누구야?”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건, 아마 이런 거였을 거다.

 




 

  하늘에 오른 사신은 지상에서의 일을 모조리 잊는다고 했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죄 잊어버린다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주 당연한 일이었는데.

 


  “가람아, 장난치지 말고…”

  “…네가 주작이야?”

 


  그럼 이쪽은, 현무겠네, 새카맣기만 하니까. 무어라 더 말을 이을 듯하던 은찬의 말을 자르며, 가람은 둘을 가리켰다. 너희가, 사신이라면, 내가, 여기에… … 그래. …. 그럼, 그 사람은 중얼이는 말들이 뚝뚝 끊겨있었다. 셋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가람은 한참이나 생각해야 했다. 마지막이라고 기억이 나던 것은, .. 그래, 제 아버지였던 청룡이, 제 멱살을 틀어쥐고 청룡문을 드나들기 직전이었다. 그 후에 제가 뭐라고 이야기했지? 청룡은 뭐라고 이야기했더라.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성큼 다가선 백건은 가람의 앞에 앉은 은찬과 현우가 무어라 말릴 틈도 없이 가람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진짜 기억이 안 난다고?"

 


  허. 어이가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게 맞을까. 너는 어차피 하늘에 오르게 될 거야. 어린애처럼 떼 쓰는 건 그만하지 그래. 그렇게 이야기 할 적마다 가람이 무슨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았는지 선명했다. 입술을 물어뜯고, 분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누구 좋으라고 내가 그래야 하는데? 하고 되묻곤 했다. 백건은 그 때마다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가람이 청룡을 끔찍히 싫어한다는 사실은 대강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꾸역꾸역 억지를 부렸던 건, 저를 위한 거였다. 지상에서의 일은 모두 잊고, 하늘로 올라버리면. 좋든 나쁘든 저에 대한 생각으로 가람이 잊지 못하게 된다면. 얼마나 멍청한 생각이었는지.

 


  "내가 백호야. 백건이라고, 진짜 기억 안 나?"


 

  백건, 그만보다못한 은찬이 백건을 말리려 했으나,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현우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가람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네가 하늘로 올라온 게 나 때문이라고, 내가 널 여기로 데려왔잖아."

 


  하늘에 오른 게, 결국엔 나 때문이었잖아. 백건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미처 끝을 맺지 못한 말들이 의미 없이 허공을 맴돌았다. 진짜로, 기억 안 나느냐고.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가람의 멱살을 틀어쥔 손에 힘을 풀 생각도 못한 채, 백건은 내내 가람이 하늘로 올라오게 된 이유를 설명했는데, 잠자코 그 이야기를 들어주던 가람의 표정이 심상찮게 변해버린 건 그 이후였다.

 


  "… 너 때문이라고."

 


  가만 백건을 올려보던 눈초리가 얼마나 냉담했는지. 틀어쥔 백건의 손을 떼어내던 손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올려보며, 중얼이던 목소리가 얼마나 지독했는지는, 쉬이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개같은 새끼."

 


  …넌, 진짜로 역겨운 새끼야. 그렇게 이야기하는 가람의 눈가가 붉었다는 건, 아마 백건만이 보았으리라. 미안하다고, 다 제 탓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해주려던 말들은 저 깊은 어드메에 쳐박혀버렸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바라보는 가람의 시선은 익숙한 것이라, 백건은 그만 음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게, 그게 아니라. 가람은 더 이상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래, 내가 여기에 쳐박힌 동안 행복했겠지. 그 말은 더 이상 백건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내 말을 좀 들어보라니까. 저도 모르게 붙든 손목이 믿기지 않을만치 가녀리기만 해서, 백건은 이게 꿈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지독한 악몽이라고. 이런 상황을 그리 바랐지만, 이렇게 잔인한 말들은 좀 너무하지 않은가, 했다. 진실로 신이라는 게 있다면, 저에게는 이러면 안 됐다고, 차오르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몇 번이나 씹어 삼키던 말이 비죽 새버렸다.


 

  "네가 계속 옆에 있어줬으면 했어. 네가 어디론가 가버릴 것 같았으니까, 아무데도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그 때의 가람은 어떤 표정이었는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다 녹아내린 그 틈에서, 가람의 웃음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았다. 이기적인 건 알아, 네가 날 증오해도 괜찮아, 그저, … 백건은 입을 다물었다. 틀어쥔 손목이 잔뜩 문드러졌다. 제 바로 뒤에 있던 은찬과 현우의 모습도 흐릿해져 버렸다.

 





  잠에서 깨어난 백건의 눈가엔 진한 눈물 자국이 남았다. 백건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그 틈에 갇혀 아주 서럽게 울음을 쏟아냈다. 그래,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아무리 바라고, 바란대도 이깟 하늘에서 제 소원을 들어주었을 리가. 비참함이란 백건이 살면서 내내 알 수 없을 감정이었는데. 가람은 여즉 잠든 채였다.


  늦여름인지, 초겨울인지도 모를 그 계절이, 스쳐지나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