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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의 낙찌님(@dungcha_zzi)의 사방신 썰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낙찌님 감사합니다.

둥굴레차!

백건X청가람

돌지 않는 계절의 끝

18.11.07






  말라비틀어진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선연하게 들렸다. 바스라진 조각들은 걸음마다 흔적을 남겼고, 그 사이사이로 겨울바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높다란 지붕의 위나, 가로등이 세워진 자리, 발자국이 남는 자리마다 하얀 눈이 두텁게 쌓여 깊은 밤이나 이른 새벽마저 하얗기만 했다. 밤이라도 찾아오지 않는 세상마냥. 






  현우는 꽤 오랜 시간을 지상에서 머물렀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면 안 되는 거 아니었어? 현우가 지상에 왔다는 소리를 들을 적마다 제일로 기뻐하던 사람은 현오였으나, 행여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한 마디씩 거들었다. 현우는 그 때마다 고개를 젓고는 했다. 겨울이 좀 길어진 것 같습니다, 하늘에 오르기 전에는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사신 후계자들이 하늘에 오른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 셀 수 없이 많은 여름과 겨울이 지나갔고, 지상에 남은 모두가 조금씩 나이를 먹었으나, 하늘에 오른 현우만큼은 중앙에서 수련을 할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어, 현오는 이따금 변한 게 없는 현우의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고는 했다.



  "다른 아이들은 잘 지내니?"



  현오의 말에, 현우는 한참을 고민했다. 은찬의 소식은 쉬이 들을 수 있었다. 올 해도 주작께서 선물을 보냈다느니, 편지를 남기고 갔다느니 하는 말이 하많았으니. 그러나 청룡과 백호는? 온실의 문은 굳게 잠겨있었고, 지상에도 내려 올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현우는 언젠가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고 둘의 온실을 찾았던 적이 있었다. 청룡공자. 문을 열고 들어가 큰 소리로 외치며 온실 구석구석을 세 번이나 돌았으나 청룡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침대 위에 누워 곱게 잠이 든 백호의 얼굴에 웃음을 참으며 잔뜩 낙서를 해냈다가 다음 해 겨울에 땅을 치며 후회를 했더랬다. 글, 쎄요. 아주 오래를 생각했음에도, 떠오르는 게 없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두 공자께서는 원체 게으르니까요. 이번에 찾아갔을 때에도 청룡 공자는 없었습니다."

  "그래? 현우 네가 못 찾은 게 아니고?"



  장난치듯 가볍게 뱉어내는 현오의 말에 크게 웃으면서, 현우는 그럴 리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사실 봄이 짧아진 탓도 있지만, 현우가 찾지 못한 것은 맞았다. 최근의 가람은 벚나무의 제일로 무성한 꼭대기나, 꽃잎이 잔뜩 떨어진 나무 아래에 몸을 웅크리고 잠이 들고는 했는데, 그 위로 또 수없이 꽃잎이 떨어져, 꽃잎으로 만들어진 작은 언덕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 찾으려고 했는데 없었다고 하자. 현오는 영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잘게 웃었다. 아니라고 우기는 현우에게서 그리운 모습을 찾았으니 퍽 반가울 만도 했다.



  "맞아, 현우야, 좋은 소식이 있는데..."






  차기 후계자가 태어났다, 라. ... 현우는 온실에 누워 눈을 감았다. 빽빽하게 선 대나무 틈으로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은이 씨에게서 연락을 받았거든. 현오는 그렇게 말문을 텄다. 아직은 너무 어리고, 차기 후계자라고 정해진 건 아니지만.... 현우는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주작 가문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여자 아이가 태어났고, 백호 가문에서는 남자애가, 현무 가문에서 태어난 아이가 조금 일렀으니, 지금쯤 주술을 익히고 있을 거야. 들을 수 없던 것은 청룡 뿐이었다. 청룡쪽에서는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을 때, 현오는 조금 복잡한 표정이었다.


  길던 겨울이 점차 끝이 나고 있었다. 잠이 들 시간이 가까워지자 현우는 현오에게 남길 편지를 써냈고, 상대적으로 포근해진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섭섭해했다. 봄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고, 현우 또한 온실 한 쪽에 마련한 침상에 기어들어갔다. 저번 해의 봄, 이었을 계절까지 내내 마른 눈이 내렸던 것은, 그저 현우의 심술이었다.






  가람은 가만히 눈을 떴다. 누가 자꾸 이딴 걸... 저는 기억에도 없는데, 귓전에 꽂힌 꽃나무와, 손바닥 안에 부서지던 낙엽을 털어냈다. 가람은 아주 한참을 투덜대며 온실의 밖을 나섰다. 문 옆에 서 가람의 죽음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신령 하나가 내내 곁을 지키며 무어라고 이야기를 건네는 것 같았으나, 가람은 흥미도 없는 표정이었다. 


  현무 이 자식, 미친 거 아니야? 눈은 쉽게 녹지를 않았다. 원래는 깨어있는 시간의 반절 정도만 눈을 녹이고는 했는데, 이번 해에는 꽃을 몇 피우지도 못했다. 잠이 드실 시간입니다, 청룡. 신령의 말에, 가람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잠이 드는 시기가 조금 이르다고 생각했으나, 딱 그 뿐이었다. 은찬처럼 중앙엘 가 새롭게 바뀐 것들을 이야기하지도 않았고, 현우처럼 가족을 찾아가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백건처럼 남의 온실엘 한참 머무르지도 않았으니. 봄이 짧아지고 있다느니, 겨울이 길어지고 있다느니 하는 건 가람에게 아무 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 소리였다. 짓이긴 입술에서 비릿한 맛이 났다. 나를 위해, 하늘에 올라주었구나. 몇 해가 지나도 그 말만큼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청룡, …"



  옆에서 내내 무어라고 하던 신령은, 가람이 들은 체도 않자 귀한 옷자락을 붙들어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일단, 좀 놓지. 무섭도록 싸늘한 표정에 신령은 얼른 옷자락을 놓았다. 그, .. 쉬이 말이 이어지지 않는 걸 보니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 한 번 얘기해 봐. 들어는 줄게. 그렇게 말하는 것마냥, 가람은 무심한 얼굴로 신령을 내려보고 있었다. 코 끝에 꽃내음이 났는데, 그게 지겨워, 가람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지상에, 봄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랄 거라고, 언짢아 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을까. 생각보다 가람이 보인 반응이 담백했던 것인지, 가람의 대답에 신령의 얼굴은 금새 봄빛으로 물들었다. 그걸 알아챘을까. 금방 다시 말을 이은 건 가람이었다.



  "그러건 말건, 난 관심 없어."



  그러니까, …. 가람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다정스런 목소리로 저를 불러주던, 그 '가족'이 언뜻 스쳐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봐야, 그렇게 이야기하던 그는 그 '가족'의 안에 포함되지 않을 거지만.



  "겨우 그깟 얘기나 하려고 불러세운 거야?"



  달갑지 않은 생각에, 가람은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신령은 두어 걸음을 물러났다. 전대의 청룡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타고난 성정이었다. 신령의 또 다른 말을 기다렸던 것인지, 저 깊숙한 어드메에 쳐박아둔 기억을 떠올렸던 것인지, 가람은 한참을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할 말, 더 없지. 그 말은 의문도 되지 못했다. 하고픈 말이 있더라도 꺼내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 비슷한 것이었다.


  차라리. 그래, 가람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가람에게 봄이란, 하잘 것 없는 것이었다. 봄이라 반가워하는 얼굴도, 날이 풀렸다 웃는 목소리도, 꽃이 피었다고 붙들던 손도, 잔뜩 들뜬 분위기도, 가람은 모두 끔찍해하고는 했다. 차라리 없어져버리는 게 낫겠어, 이깟 계절 같은 거. 생각과는 다르게 울컥 눈물이 날 뻔 해서, 가람은 소매로 얼른 눈가를 문질렀다. 소맷자락에 얼룩이 졌다, 누구의 울음이었는지도 모르는.


  가람은 온실의 제일 가운데에 있는, 큰 벚나무에 자리를 잡았다. 높지 않은 키에, 가지가 널찍하게 퍼져있어, 사이에 가 눕기에 딱 알맞은 자리였다. 가람은 편하게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 해의 봄은 한 달을 채 채우지도 못했다. 다 사라져버리면 좋을 텐데. 내내 중얼이던 목소리는 점차 멎어들었다. 숨소리도 멎어, 온실엔, 완벽하게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남았다.






  백건의 걸음이 빨랐다. 그게 무슨 헛소린데? 어차피 신령 또한 은찬에게 들은 말만을 그대로 전해주었을 거였는데. 신령에게 암만 화를 내봐야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 이야기는 중앙에서 현우에게로, 현우에서 은찬에게 전해졌다. 은찬은 언제나 그랬듯 백건에게 인사를 남기며, 마지못해 덧붙인 거였다. 그, 백건, 이건 좀 다른 얘긴데…. 얼굴을 마주하고 전할 수 있는 이야기였더라면, 은찬은 분명 그랬을 거다. 마주모은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시선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하염없이 땅만 바라보고, 잔뜩 말을 늘이고서야, 화 내지 마, 하고 단단히 주의까지 주면서. 



  "청가람,"



  현우나 은찬과는 달리, 백건은 언제나 가람이 잠든 장소를 기가막히게 찾아내고는 했다. 가람이 잔뜩 쌓인 꽃잎에 파묻힌 채 잠이 들었을 때도 그랬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가람이 딱 그곳에 있을 것만 같았어서…. 백건은 가만 가람의 손을 쥐었다. 손등을 다 가리는 소맷자락의 아래에서 쥐어낸 거였다. 


  부른다고 해도 너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암만 네 이름을 씹는대도 너는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다. 네 손을 그러쥐고 한참 손장난을 쳐도 너는 모를 것이고, 네 곁에 평생을 머무른다고 해도, 너는 그래도 모를 거니까…. 눈가가 금방 붉어졌다. 너를 보지 못하게 되리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는 무엇인가 변화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 하나의 계절을 하나의 사신이 담당하는 것은 맞지만,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죽어버리지 않고, 서로 얼굴을 보며 그렇게 이야기나눌 수 있는 일이 생길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 지금까지 견뎌낼 수 있는 거였다. 너를 향한 미안함이 얼마나 크고, 죄책감을 얼마나 느꼈는지, 몇 번이나 후회를 곱씹었는지, 분명히 네게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신령은 어차피 백건을 쫓아 온실로 따라들어오지 않았으니, 그 온실엔 오롯이 저와 가람만이 남아있는 거라, 백건은 아주 오랜만에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 해의 가을 또한 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봄만치 짧지는 않았으나, 가을은 아주 늦게 찾아왔다. 그 가을에, 백건은 거의 가람의 온실에만 머물렀다. 봄이 짧아졌다는 소식을 전하며, 가을도 곧 그렇게 되리라고 이야기했으니, 그렇게라도 얼굴을 봐야겠다는 욕심이었다.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오기 직전까지, 백건은 내내 가람의 곁에 앉아 지나온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너는 끝까지 날 원망하겠지."



  그건, 좀… 마음이 아프네. 그렇게 이야기하며 백건은 애써 웃었다. 들리지 않을 고백이었지만, 그래도 그렇게라도 전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