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de-image




둥굴레차!

청가람x백건x주은찬

진심

14.09.07







“넌 거실에서 자.”


싸늘한 가람의 목소리와 함께 탕,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백건은 제자리에 멀거니 서서 넋을 놓고 있다가, 퍼뜩 정신이 든 듯 문을 두드리며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옆방에서 현우가 빼꼼 고개를 내밀며 중얼거렸다. 또 시작이군요, 백호 공자. 백건이 홱 째려보며 주먹을 쥐자 현우는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또야?”


내내 벽에 기대어 앉아 휴대폰게임을 하던 은찬이 관심이 보였다. 현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동안 조용하겠군요, 하고 말했다. 하하. 은찬은 납득하듯 작은 소리로 웃었다. 
정말로 한동안 중앙에서는 아무런 소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 굴러갔고, 그 속에서 소음만이 조용히 빠져주었을 뿐이었다. 가람이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곁으로 다가와 오늘 아침은 고기반찬으로 해, 오늘 점심은 고기반찬으로 해, 오늘 저녁은 고기반찬으로 해, 하며 귀찮게 구는 일도 없었고, 식탁 위에 올라간 반찬이 너무 적지 않느냐며 투정을 부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밤마다 멱살이 잡혀 마당으로 던져지는 일도, 시도 때도 없이 어거지로 입을 맞추거나 애정을 갈구하는 일도 없었다. 중앙에 온 이래로, 가람의 얼굴이 이렇게나 환한 건 난생 처음이었다.

가람이 세상이 아름답다느니, 이제야 좀 편안하다느니 하는 말들을 지껄이는 동안 백건의 심기는 내내 불편하기만 했다. 매일 식탁에 풀 쪼가리가 올라오고, 고기반찬이라고는 끽해야 하루에 한 번 소시지 볶음이 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요즘에는 한 주에 한 두 번정도는 겨뤄주던 대련도 더 이상은 해주지 않았다. 매화장에 가봐야 호승심도 느껴지지 않는 소꿉친구 한 명, 약해빠진 후계자 한 명이 전부였다. 은찬과 현우와 한 방에서 세 명이 다닥다닥 붙어 잠을 잤고, 빨래를 널거나 음식을 준비할 때 다가가 입을 맞추던 것도 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불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고, 더 이상 욕구를 참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때, 은찬이 백건의 눈에 들어왔다. 





은찬은 아무런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백건이 화장실엘 쫓아 들어온 건지, 제 손목을 붙들고 우악스럽게 입을 맞춰온 것인지, 어째서 입술을 떼고 난 후에 그렇게 후련한 표정을 지었고, 고맙다고 말하며 어깨에 손을 얹었는지도. 은찬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상황파악이 덜 된 머릿속은 그저 복잡하기만 했고, 무슨 일인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은찬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짧은 신음을 뱉었다. 

그 때부터였다. 은찬이 백건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백건의 모습만 나오면 걸음을 돌리고, 일부러 멀찌감치 떨어져 걷기 시작한 것은. 그리고 그럴 때마다 백건은 은찬의 어깨를 누르며 벽으로 밀어붙이고는, 그 때처럼 입을 맞춰왔다. 날이 갈수록 백건은 대담해졌고, 은찬은 그럴수록 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욕조에 몸을 담군 채로, 아주 오랫동안이나 생각했다. 백건은 십여 년이나 소꿉친구였다. 오래전부터 함께 무술수련을 했고, 대련을 했다. 비록 사는 곳은 달랐지만 은찬은 하루가 멀다하고 백건의 집을 찾아가고는 했다. 그때도 이런 감정이었을까? 같이 대련을 하는 나이가 맞는 친구가 아닌, 정말로 좋아해서 찾아간 것이었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잠…까안, 백건, 들키겠어…!”


제 방으로 돌아가려던 은찬을 붙들고 입을 맞추었고, 그걸로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백건이 다시 한 번 다가오던 때였다. 은찬은 백건을 밀어내며 작게 중얼거렸지만 그 짧은 순간에 백건의 눈이 어딜 향했는지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상관없잖아.”


백건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무작정 키스했다. 은찬은 그마저 밀어낼 힘도 없어 손목을 붙들린 채였다. 드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얼른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백건은 그마저도 허용해주지 않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는 단 일 초도 가지 않았다. 열린 즉시 다시 문이 닫혔고, 백건은 그제야 입술을 떼며 손등으로 은찬의 입술을 훔쳤다.


“넌 대체……”
“스릴있잖아.”


백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커져 있었다. 은찬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빠른 걸음으로 멍걸이의 목줄을 쥐고 대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백건은 은찬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가만히 입을 떼었다.


“언제까지 엿들을 셈이야?”


그리고 다시 문이 열렸다. 가람은 미간을 좁히며 백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저를 노려보는 가람을 바라보던 백건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제 때 제 때 풀어주지 않으면 곤란하거든.”
“……”
“그도 그럴게, 여긴 공동지역이잖아?”


백건의 말에, 가람은 허! 하고 혀를 차더니 성큼성큼 마당으로 나왔다. 백건은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가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람이 무어라고 종알거리는 것 같기도 했으나,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백건은 시끄럽고, 하고 낮게 중얼거리더니 곧장 제 입으로 가람의 말을 막았다. 가람은 처음은 백건을 밀어내는 듯 하다 이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멍. 등 뒤에서 멍걸이가 짖는 소리가 들리고, 가람은 얼른 입술을 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은찬은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백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건은 무엇이 문제냐는 표정으로 은찬을 바라보았다. 은찬의 얼굴에선 환하던 미소가 사라지고, 딱딱한 표정만이 남았다.


“……백건.”
“주은찬, 이건…”
“……백건, 넌…”


은찬에겐 이미 가람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가람은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오로지 백건만이 그 사이에서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은찬의 목소리가 얇게 떨렸다.


“…10초 안에 대답해.”


백건, 넌…. 은찬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듯 했다. 시야가 흐려져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우윽. 은찬은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참아내며 한 글자, 한 글자를 힘겹게 배어냈다.


“……넌, 진심이 아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