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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AU

둥굴레차!

백건X청가람

청춘예찬

14.10.16







이젤에 걸린 하이얀 캔버스를 보았다. 다리가 세 개가 달린 어정한 의자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연약하게 보였다. 손가락 사이에 걸린 붓 끝에서 물이 뚝 떨어졌다. 바닥에 얕게 고인 물기를 바라보다, 백건은 신발 바닥으로 쓱 바닥을 훑었다.


오늘도 캔버스 한 점이 사라졌다. 백건은 미술실에 쌓인 제 얼굴들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저께엔 두 점이 없어졌고, 어제는 세 점이 없어졌다. 왜 가져갔는지는 알았지만, 누가 가져갔는지는 몰랐다. 미술실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있었고, 백건은 잠깐 신경만 쓸 뿐 그림을 가져간 것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림은 다시 그리면 됐다.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었고, 그리고 누군가가 가져가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다행인 셈이라 더 그랬는지도 몰랐다. 백건은 붓을 바로 쥐었다. 하얗던 캔버스가 다시 잿빛으로 물들었다.

 





어려서부터 숱하게 느껴온 것이었다. 그때마다 은찬이 아니라고 말해주었지만, 은찬을 만나기 전부터 느껴오던 것이었다. 누나인 백은에게서는 언제나 반짝반짝한 빛이 난다고 생각했다. 백은이 만진 소파의 등받이, 놀이터에 흔하게 널린 모래알이나 시선을 주었던 버려진 고양이,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동화책, 그 모든 것들에서 빛이 난다고. 백은이 말을 할 때마다 입술 사이로 별빛이 튀어나왔다. 손끝에서 별빛이 떨어졌다. 눈에 환하게 빛나며 어여쁘게 웃을 때,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온 별빛이 그토록이나 아름다웠다.


백은은 언제나 사랑을 받았다. 유난히 아버지는 백은을 아꼈고, 백건은 그걸 뼈저리게 느꼈다. 매일 아침 굿모닝 키스를 나눌 때, 손을 잡고 걸으며 백은에게로 우리 공주님, 이라고 말할 때마다 백건은 숨이 막히는 것만 같은 지겨운 기분을 느껴야 했다. 어리던 백건은 누나처럼 되고 싶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싶었고, 제 행동 하나하나에서 별빛이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문득,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을 때, 백건은 그만 구역질을 할 것만 같았다.


그 후로 백건은 제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누나의 모습이 담긴 캔버스를 모두 찢어버리고, 하얀 캔버스 위에 제 얼굴을 그려냈다. 그러면, 저한테도 별빛이 떨어질 것 같았다. 완벽한 것이 하나도 없지만 그림 속에서만은 완벽하리라 믿었기에, 오로지 그 믿음 하나로 백건은 지금껏 버텨왔다. 창밖을 바라보다, 어젯밤 또다시 들려온 누나의 CF 계약 소식을 듣고 아주 오랫동안 우울해있었다. 뛸 듯이 기뻤지만, 그와 동시에 비참한 기분을 느껴야했다. 백은은 여전히 그곳에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백건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멍하니 힘이 빠진 손끝에 걸린 붓과, 온갖 색으로 물든 캔버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견디기가 힘들었는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완성되지 않은 캔버스엔 형체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걸 바라보며 자기와 조금 닮았다고 생각하다니. 미친 게 틀림없군. 백건은 조그맣게 속삭이며 미술실을 나섰다. 복도 끝에서부터 조용하게,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 주은찬. 매점가자.”

 


백건이 은찬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 나 지금 급식매점가자. 하여튼 백건. 은찬이 툴툴거리며 뒷문에 달라붙어 저를 바라보는 친구 두어 명에게 머쓱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재수없어. 툭 어깨가 부딪히고, 아이들이 스쳐지나갔다. , 말을 왜 그렇게 해! 멀찍이 멀어져가는 그 뒷모습에 대고 은찬이 계속 소리쳤지만, 친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 백건이 짧게 혀를 차며 걸음이라도 옮길 듯 몸을 움직이자 은찬이 잽싸게 손목을 붙들었다.

 


가자, 매점. 매점가자며.”


 

매점 뒤편의 버려진 의자에 앉아, 백건이 덥석 빵을 물었다. 은찬은 그걸 가만히 바라보며 우유에 빨대를 꽂아 입으로 가져갔다. , 너 인터뷰 실렸더라. 문득 생각이 난 듯 건넨 말에 백건이 심드렁하게 고갤 끄덕였다. 실렸겠지.


 

인터뷰 봤어.”

 


봤어? , 봤어. 은찬이 희미하게 웃으며 답하자 백건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너 또 대답 그따위로 했지.”



냉정한 말에, 백건이 그래서 뭐,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은찬은 그게 썩 마음에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도 그랬다. 번번이 인터뷰를 거절했다는 말에 왜, 하면 좋잖아, 하고 등을 떠민 것도 은찬이었으니까.



넌 유명인사야, 백건.”

그래서?”

그래서라니,



거기까지 말하다 은찬이 꾹 입을 다물었다. 뭔데. 푹 옆구리를 찌르며 백건이 물어왔다. , 싫어, 말 안 할 거야. 투정인지 뭔지 구분도 가지 않을 목소리로 은찬이 투덜대자 백건이 푸,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 그런 건 어디서 배웠냐. 진짜 말 안 할 거야? 안 해, 안 할 거야. 은찬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백건의 손을 피했다. 내내 입에 물고 있던 빨대가 바닥에 떨어진 것도 몰랐다. 은찬은 백건에게서 아주 멀찍이 서서 저를 바라보는 백건과 눈을 맞추다가, 알았어, 안 물어봐, 하고 꼬리를 내리는 체를 하자 슬그머니 다시 곁으로 돌아갔다.


둘은 한참이나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렸을 적부터 함께 자라왔던 터라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는 대화였지만, 드문드문 고개를 내미는 추억을 끄집어내 그 이야기를 하다, 다른 것이 생각나면 화제를 돌렸다. 둘의 대화는 참으로 향방도, 남는 것도 없는 말들이었지만 둘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은찬은 친구가 많았지만 사람을 썩 깊게 사귀는 편이 아니었고, 백건은 보이는 대로은찬 말고는 마땅한 친구도 없었으니까.






예비 종이 치자, 백건이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시간 끝났네, 가자. 은찬이 가만히 고갤 끄덕이며 백건의 뒤를 따랐다. 두어 걸음을 멀찍이 떨어져서, 은찬은 가만히 앞서 나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보아온 모습인데, 그날따라 뭐가 그렇게 달라보였던지. 은찬은 제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도 알지 못했다.



너 아직도 그런 생각해?”

무슨 생각?”

아직도, 백은 누나만 빛나는 것 같아?”



주은찬. 백건이 이마를 짚으며 은찬의 이름을 불렀다. 굳이 입 밖으로 내지 말라 당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암묵적으로 금기되는 말이었다. 백건은 그걸 은찬에게만 털어놓았다. 아주 서럽게 울었고,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남에게 망가진 모습을 보여준 때였다. 은찬은 아직도 그 때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제 팔을 붙들고 어딘가로 꺼질 듯 울음을 토하며 제 가슴에 수도 없이 못을 박았더랬다. 그 때부터 은찬도, 백건도 그 때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은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주은찬.”

.”

다시는 그 얘기 꺼내지 마.”

……



이어지는 침묵에 백건의 얼굴이 사납게 변했다. 은찬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미안해. 내가 성급했어. 은찬은 걷지도, 멈춰서지도 못했다. 어정쩡한 자세로 서 계속해서 걸음을 뗄까 말까를 고민했다. 먼저 자리를 떠난 것은 백건이었다. 금방 종 치겠다, 얼른 들어가. 언제나처럼 뒤라도 돌아봐줬으면 마음이 덜 아팠을 텐데, 야속하게도 그러지 못했다. 은찬은 멀거니 서 백건이 멀어지는 걸 바라보기만 하다가, 종이 치자 그제서야 미적거리며 걸음을 떼었다. 백건. 은찬은 입속으로 가만히 이름을 불렀다. 넌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


멈칫 걸음을 멈추고 은찬이 고갤 들어 벽 한쪽에 걸린 그림을 보았다. 우거진 수풀 사이로 얇은 오솔길이 나 있고, 그 끝엔 밀짚모자를 쓴 어린 아이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길의 끝에서, 아이는 잠자리채 하나를 쥐고 외로이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지독하게도 외로워보였다. 방학숙제. 짧은 타이틀 아래, 익숙한 이름 하나가 보였다. 백건. 미술 경진대회, 대상. 은찬은 손으로 그 이름을 한참이나 쓸어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무엇이라도 붙은 듯 발을 떼는 일이 고역이었다


백건, 너는 정말.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