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de-image




둥굴레차! 

청가람

나의 어린 시절

14.10.11







어릴 적엔 그게 진짜인 줄만 알았어.


 

엄마, 아빠는 가람이를 좋아해?”

그럼, 아빠가 가람일 얼마나 사랑하는데.”

 


내 손을 잡은 그 손이 얼마나 따뜻하던지. 아마 내가 사실대로 알고 있었더라도, 그 온기에 이기지 못해서 믿는 척을 하지는 않았을까. 피가 섞인 건 아니었지만,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가람이도, 아빠가 너무너무 좋아.”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멍청한 말은 하지 않았겠지. 말도 안 되고, 우습기만 한 그 말 말이야. 요즘에도 자꾸 꿈에 나와. 멍청하게 그를 기다리는 내가, 뭣도 모르고 환하게 웃고만 있고.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괜스레 불쾌한 기분이 들어. 너는 아마, 이해 못하겠지.

 

 

 



아주 어렸을 적의 일이었다. 그가 사신이 되고, 일주일 동안 인간계에 내려올 시간이 생기던 날. 내가 딱 일곱 살이 되던 해였다. 유치원을 마치고 해질녘 집에 돌아가던 때에, 아빠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무척이나 부러워 그걸 오래토록 지켜보고는 했다. 그는 나를 이따금 바라보기만 했을 뿐 그렇게 상냥하고 다정스런 얼굴로 웃어준 적이 없었기에, 나는 그게 퍽이나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중에야 그게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여전히 그는 내게 웃어주지 않았고, 나도 그의 웃음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에게 말을 꺼낼 용기가 생겼다. 언제나 엄마를 향해 미소 짓고 부드러운 말을 건네던 당신의 얼굴이 퍽이나 상냥해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때의 나는 영약하지 못하고 그저 순진한 어린아이일 뿐이었어서, 엄마의 곁에 있는 당신이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당신이 웃고 있었고, 그 뿐이었다. 웃고 있었으니까. 내게는 결코 보여주지 않던 다정함이 가득 물든 얼굴이었으니까.


 

저기, 아빠.”

 


옷깃을 잡아끄는 나의 행동이 당신의 심기라도 건드린 것인지, 일순 당신의 표정이 굳었었다. 물론 어리던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아마 곁에 엄마가 없었더라면 당신은 나를 잔인하게 내치지 않았을까.


 

, 학예회가 있는데……


 

보러,와주시면,안돼요? 어린 아이의 수줍은 말들이 당신을 움직였을 거라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저 곁에 엄마가 있었으니까, 곁에 앉아있던 엄마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사랑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엄마의 관심이 아니면,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래, 솔직히 고하자면 뛸 듯이 기뻤다. 당신이 내게 관심을 보였다는 것, 당신이 내 말에 대답해주었다는 것,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상냥한 미소를 띠어주었다는 것. 마치 몇 년 동안 미뤄두었던 선물이라도 받은 것 마냥 기뻐서, 나는 그걸 차마 감출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을 끌어안고 고맙다 말하고 싶었지만 그 어린 시절의 내게도 눈치란 것이 있기는 하였는지 나는 손톱을 깨물며 한 걸음을 뒤로 물러났을 뿐이었다. 곁에서 엄마가 자꾸만 물어왔다. 연극을 한댔지? 무슨 역이니? 당신의 시선이 날카로웠고, 나를 노려보는 그 눈엔 살기마저 느껴지는 것 같이 소름이 돋았다. 용감한 기산데, 주인공,이래요.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대답하자, , 가람인 좋겠네, 하고 화하게 밝은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손을 꼭 쥐며 엄마도 그날 꼭 갈게, 가람인 정말 잘 할 거야, 라고 말했고, 주먹을 쥔 당신의 손이 수도 없이 떨렸더랬다. 언제니? 금요일. 엄마 그 날 꼭 시간 내볼게, 약속해, 가람아. 뺨에 키스를 해주었고, 나를 품에 꼭 안아주었다. 그 품은 참으로 따뜻했지만 어쩌면 난 당신의 그 차가운 눈을 보는 것이 무서워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눈을 꼭 감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연극 발표를 하던 당일. 나는 그 널따란 무대에서, 수많은 관중 속에서, 연극을 하는 내내 당신의 얼굴을 찾아야 했다. 당신이 어딘가에 서서 팔짱을 낀 채 언제나와 같은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봐주지 않을까하는 그런 기대감에 연극에 제대로 집중도 하지 못하고 당신을 찾아야했다. 연극이 끝날 때까지 난 당신을 찾지 못했다. 당신은 그 어디에도 없었고, 연극이 끝난 후에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고, 선생님과 사진을 찍고, 다른 친구들과 사진을 찍는 데에도, 당신은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용감한 기사님이었다. 칼을 들고 사악한 용을 무찌르는 용사님이었다.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용을 무찌르는, 사악한 용에게 괴롭힘을 받는 마을 사람들에게 언제나 의지가 되는, 용에게 잡혀간 공주님을 구하고, 공주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용감한 기사님이었다. 선생님은 몇 번이나 내 손을 잡고서 잘했다고 말했다. 공주님이었던 여자애도 나를 바라보며 멋있다고 했다. 사악한 용이었던 친구도 대단하다며 나를 꼭 끌어안아주었는데. 그 아이들의 부모님도 있었고, 내 머리를, 어깨를 쓸어주며 어느 집 아이인지 참 대단하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 자리에 마땅히 있어야 할 당신이 없었다. 원래라면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였다. 내 머리를 쓸어주고 어깨를 쓸어주고 잘했다, 고 말해주는 것은, 당신이여야했다.


노을이 지는 저 먼 곳을 바라보며, 나는 아주 오랫동안 울었다. 할아버지도, 엄마도, 당신도, 그 누구도 나를 보러 와주지 않았다. 나는 용감한 기사님이었고, 당신에게 그걸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내가 사악한 용을 물리치던 걸, 마을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던 걸, 공주님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던 모습을, 그저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유치원의 운동장 한구석에 쭈그려 앉아, 당신이 오기를 기다렸다. 파랗던 하늘이 노랗게 물들었다. 노랗던 하늘이 점점 보랏빛으로 물들고, 끝끝내 세상이 검게 물들던 때였다. 손전등을 든 경비 아저씨가 내게 다가와 얼른 집으로 가라고 말했고, 나는 엉엉 울며 당신의 이름을 불렀다. 당신이 끔찍하게도 싫어했겠지만, 그 때에 생각나는 건 할아버지도, 엄마도 아니었다. 오직 당신뿐이었다. 모두가 떠나간 유치원의 운동장은 조용하기만 했다. 이따금 경비 아저씨가 든 손전등 불빛이 비쳤고, 온 세상이 까맣게 변하고 저 멀리에서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가 날 때 쯔음, 아주 먼 데에서부터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가람아!”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다시 울음이 터졌다. 나는 엄마의 품에 안겨 아주 한참을 울었다. 엄마는 나를 끌어안고, 내 얼굴을 쓸어주고,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 연신 미안하다고 말했다. 엄마가 늦게 와서 미안해, 가람이가 연극 하는 걸 보러가지 못해서 미안해, 지금까지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해, 가람아 엄마가 너무너무 미안해.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엄마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당신의 얘기는 단 한 번도 꺼내지 않고, 가람이가 용사님이었지, 참 멋있었을 텐데. 엄마가 가람이만했으면 가람이한테 한눈에 반하지 않았을까? 하며. 어떻게든 내 기분을 띄워주려고 노력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노란 달이 떠있었다. 길을 비추는 가로등 불빛이 하나 둘 켜졌고 나는 여전히 엄마의 품에 안겨있었다. 손에 꼭 쥔 옷자락이 보였다. 하이얀 블라우스의 맨 윗 단추가, 다 뜯어져 너덜너덜해져 있어서, 나는 당신의 가슴팍에 더욱 얼굴을 파묻으며 옷자락을 쥐었다.



엄마. 아빠는……



, 가람아. 엄마의 부드러운 목소리. 나는 거기에서 또 한 번 울어버릴 뻔 했다.



……가람이를미워해?”



아니야, 어떻게 아빠가 가람이를 미워해. 오늘 너무 바쁘셔서, 시간이 안 나신 걸 거야. 아빠는 너무 바쁘잖니.




 

 

당신을 아주 많이 원망했다. 아마 당신 또한 나를 많이 증오했을 것이다. 당신에게 있어 나는 언제나 눈엣가시였고, 당신의 귀찮은 일을 떠맡을 대용품에 불과했을 테니까. 요즘에도 문득, 노란 달이 뜬 밤이면, 모두가 소리를 죽인,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만이 들리는 날이면, 나는 아직도 그 생각이 난다. 엄마의 품에 안겨서, 그 옷자락을 쥐고 엉엉 울다 지쳐 잠드는 그 날을. 내가 하루 온 종일을 바랐던 당신이 오지 않은 그 지옥 같은 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