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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의 낙찌님(@dungcha_zzi)의 사방신 썰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낙찌님 감사합니다.

둥굴레차!

백건X청가람

돌지 않는 계절의 끝

14.12.07








  주은찬이 죽었다.

 


  아니, 물론, 남들이 오해할 정도로 그렇게 죽어버렸다는 것이 아니고, 그저 숨이 멎었을 뿐이었다. 은찬은 제 온실로 돌아갔다. 곳곳에서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나고 화사하게 꽃들이 피어난, 녹음이 무성한 조그마한 숲이었다. 좋은 아침이야, 백건. 은찬이 거느리던 시녀들의 말에 의하면, 은찬은 그렇게 말하며 잠이 들었다고 했다.





 

  “그으래, 좋은 아침이다. 주은찬.”



  백건은 가만히 은찬이 잠이 든 온실의 손잡이를 쥐었다가, 끝내 놓아버렸다. 내가 깨어났으니, 지상은 이제 가을이 오려나. 백건은 푹 숨을 뱉었다. 사신이란 것은, 어쩌면 이렇게 효율도, 쓰잘데기도 없을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황순이 할머니도 말해준 적 없었고, 현 사신이라던 제 삼촌도 언질을 해준 적이 없었다. 하나의 사신이 하나의 계절을 담당한다고 했던가. 등받이에 몸을 파묻으며, 백건이 눈을 감았다.


  봄을 다스리는 청룡은 눈이 쌓인 들판을 녹이며 꽃씨를 틔우고, 여름의 주작은 깊게 묻힌 씨앗에, 푸르게 자라난 잎새에 물을 내린다. 가을의 백호는 새파랗게 물든 잎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하늘을 띄우고, 겨울의 현무는 바닥에 떨어진 잎들을 다시 땅 속 깊이 묻어버리며 그 위를 새하얀 눈으로 뒤덮는다. 그리고 다시 청룡이 깨어나고, 세상의 눈을 모두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 탓이라 했다. 저렇게 각자의 할 일이 있기 때문에, 네 명의 사신 중 깨어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명뿐. 그도 마음대로 깨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시간에 따라 죽음이 찾아오고, 다시 물러가는 것이다. 아니, 애초에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어차피 다시 눈을 뜨고, 다시 눈을 감을 텐데.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그들이 하는 말이었다. 청룡도, 주작도, 백호도, 현무도, 모두들 그걸 그냥 죽음이라고 불렀다. 누가 먼저 우리가 잠드는 건, 죽는 거랑 마찬가지야, 라고 말한 것도 아닌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때가 되면 곧 죽겠구나, 하고 쓰게 웃고는 했다. 눈도 뜨지 않았고, 움직일 수도 없었고, 숨도 쉬지 않았다. 언젠가 백건은 은찬의 온실을 찾은 적이 있었다. 죽은 듯 나무 등치에 기대어 잠이 든 은찬을 오래오래 바라보다, 백건은 가만히 은찬의 코 아래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숨소리는 나지 않았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것 또한 아무것도 없었다. 암만 이름을 부르고 흔들어 봐도, 은찬은 깨어나지 않았더랬다. 그 때 백건은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곧 받아들여야 했다. 백건 또한 그랬다. 꼼짝도 하지 않고, 숨도 쉬지 않은 채, 그렇게 죽은 듯 잠이 들었다. 생각을 해봐야 어차피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생각이 들자 백건이 얼른 허리를 곧추세웠다. 짜증스런 생각을 하니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지상의 잎새들을 모두 샛노랗게, 새빨갛게 물들이고, 인간들의 머리 바로 위에 떠 있는 하늘의 거리를 벌리는 것이다. 매일매일, 조금씩, 그렇지만 느리지는 않게. 그게 참 머리가 아팠다. 하루만에 싹 변해버리면 좋을 것을. 물론 수십 년을 보고 자란 것이니 그게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귀찮은 것은 귀찮은 것이다.


  사신으로써 깨어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깨어날 수 있는 것은, 일 년의 고작 3개월뿐이다. 고작 90일의 시간, 고작 2160시간, 고작 129600.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고작 그 정도. 백건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가 그토록 노력해서 얻은 결과가 이 따위라니. 일 년의 90일 밖에 깨어있지 못한다니. 아니, 사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청가람.”



  너를, 마주할 수가 없다는 것.




 

 

  중앙에서 지내던 그 몇 년. 가람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다. 난 절대로 사신이 되지 않을 거야. 사신이 돼서 하늘로 올라가건 말건 너네 마음대로 해. 백건은 그런 가람을 바라보며, 언제나 되물었다.



  “사신이 되지 않으면, 뭘 할 건데?”



  그러면 가람은 입을 다물고 마는 것이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 어떤 말도 뱉지 못한 채, 그저 가만히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백건은 그게 퍽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사실 백건은 가람이 사신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사신이 되지 않으면 뭘 할 건데? 네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그렇게나 가람을 몰아붙이던 것이었고, 그래서 그렇게 가람의 가슴에 못을 박은 것이었다. 너는 선택할 권리도, 기회도 없으니, 얌전히 나와 함께 사신이 되자. 백건은 매일 밤 잠이 든 가람의 등에다 대고 그렇게 속삭였다.


  하늘에 오르기 바로 전 날 밤.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백건의 등에 대고, 가람이 가만히 속삭였다.



  “, 하늘에, 올라 갈 거야.”



  땀에 절은 백건의 옷자락을 쥐고서, 가람은 그렇게 말했다.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고맙다는 말을, 백건은 끝까지 해주지를 못했다. 그럴 줄 알았어. 사실은 하나도 모르고 있었지만, 기대를 접고 다 포기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쭈뼛거리며 그렇게 말을 하는 가람을 보고 있자니 그저 가슴이 벅차기만 해서, 백건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마지막 날까지. 하늘에 올라 자리를 부여받고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갈 때까지, 백건은 가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나와 함께 하늘에 올라주어 고맙다, 사신이 되어주어 고맙다. 끝까지 미루고 하지 못한 고맙다는 말은, 결국 죽어버린 그 몸뚱이에 돌아갔다. 하늘에 올랐던 것은, 하늘이 마냥 맑고 높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사신이 된 다음 날 백건은 곧장 가람이 있는 동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백건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청룡께서는 지금 잠이 들어 계십니다.”



  틀어 올린 머리에 비녀대신 분홍빛이 잔뜩 도는 벚나무 가지를 꽂아 넣은 여자 하나가 그렇게 말했다. 동쪽 청룡의 온실을 막고 있는 모습이었으니 분명 청룡의 휘하에 있는 신령 중의 하나일 것이었다. 곱게 모은 손 아래로 부드러운 천이 흐르듯이 떨어졌다. 들어가는 건 괜찮잖아? 백건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건을 안으로 안내했다. 가람이 잠든 방은 지독한 꽃내음이 났다. 좁게 난 길 위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나무가 있었다. 그 온실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가람은 죽어 있었다. 굵게 뻗어난 나뭇가지에 누워, 고운 자태로 잠이 들어 있었다. 손이 닿지 않았기에, 백건은 그저 밑에서 수도 없이 가람의 이름을 부르다, 그 옆에 있던 신령의 손에 이끌려 온실을 빠져나온 것이 다였다. 하나의 신이 하나의 계절을 다스린다는 것도, 제 계절이 아닌 날에는 죽은 듯 잠에 빠져든다는 것도 모두 그 신령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였다. 백건은 멍한 표정으로 제 거처로 돌아왔고, 그리고 멀거니 가람의 이름을 부르기만 했다.


  백건은 그 이후로 몇 번이나 가람을 찾아갔다. 그 때마다 가람은 여전히 잠이 든 채였고, 문을 막고 있던 신령 또한 여전히 백건에게 청룡께서는 잠이 들어 계신다.’라고 기계적인 말만 반복했을 뿐이었다. 백건은 가람이 잠든 나무 등치에 앉아 슬쩍 손을 뻗었다. 뒤척인 듯 나뭇가지 아래로 떨어진 손끝이 닿았다. 백건은 그걸 쥐고, 가만히 흔들어보았다. 앞뒤로 흔들리는 팔은 참으로 쉽게 움직였다. 백건이 힘을 주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이리 휙, 저리 휙. 그게 우습고 슬퍼서, 백건은 몇 번이나 가람의 밑에서 울음을 삼키고는 했다.


  현실을 깨닫자 백건은 지상의 잎들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새파란 잎들 사이로 듬성듬성 색이 짙게 물든 단풍들이 보였고, 하늘이 높게 떠올랐다. 예년보다 가을이 조금 더 늦게 찾아온 해였다. 지상이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고, 하늘이 지독하게 높던 가을의 끝, 겨울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백건은 죽어버렸다. 잠이 들었다. 계절이 돌아 다시 여름이 지고, 가을이 올 때까지, 백건은 깨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