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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의 낙찌님(@dungcha_zzi)의 사방신 썰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낙찌님 감사합니다.

둥굴레차!

백건X청가람

돌지 않는 계절의 끝

14.12.13







  가람이 천천히 눈을 떴다. 지상은 따사로운 햇볕에 한참 눈이 녹고 있던 때였다.


 

  “일어나셨어요.”

 


  신령 하나가 웃으며 가람에게 다가왔다.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불편하신 건 없으셨는지요. 이것저것을 물어오며 귀찮게 구는 바람에 가람이 손짓을 하며 부를 때까지 나오지 말라고 했다만. 가람은 멍하니 제 온실을 거닐었다. 잔뜩 꽃망울을 맺은 벚나무가 줄지어 늘어서있고, 그 아래로 좁게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남았다. 보나마나 신령들의 흔적이었겠지. 가람은 픽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벚꽃이 그렇게 진한 향을 풍기는 것도 아닌데, 수십 그루의 벚나무가 있으니 그 연하던 냄새조차 진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가람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꺼풀 위로, 벚꽃잎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하늘로 처음 올라오던 날. 가람은 제 아버지인, 현 청룡을 만났다. 그는 벚나무에 기대어 앉아 사진 한 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역겹게도, 그 눈길이 더없이 부드럽고 사랑스러워보였다. 그는 연신 웃는 얼굴로 사진을 바라보다, 가람을 발견하자마자 얼굴을 굳히며 픽 웃음을 흘렸다.



  “오래 걸렸구나.”



  가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청룡은 품 안에 사진을 숨기며, 가만히 가람에게로 다가왔다. 여전한 얼굴이, 지겹게 느껴졌다. 사신은 늙지도 않는다고 했던가. 물론 겉모습이야 마음먹은 대로 바꿀 수 있지만, 현 청룡은 더욱 늙게는 모습을 바꾸어도 그보다 더 젊은 시절로 모습을 바꾼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실로 간단하고도 명쾌했다.



  “그녀는, 잘 있느냐.”



  매일매일 그 하늘에서 훔쳐봤을 거면서. 가람은 입을 다물고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청룡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 그래도 수고했다.”



  가람의 어깨를 찍어 누르는 손이 마냥 크고 무겁기만 했다. 한 쪽으로 어깨가 기울자, 가람이 얼른 자세를 고쳐 잡았다. 청룡은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로 가람의 귓가에 대고 웃음을 흘렸다. 그는 몇 번이고 강조했다.



  “나를 위해, 이렇게나 빨리 하늘에 올라와 주었구나.”



  나를 위해. 나를, 위해. 그 말이 참 잔인했다.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가람의 의지였다만, 당신을 기쁘게 할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다. 하늘로 올라오는 그 순간까지 당신의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당신을 위해서라든지, 하는 생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그 말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지독한, . 지독한, 사람. 청룡은 가람의 어깨에 얹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어깨가 으스러질 것 같이 아팠지만, 아까의 그 말은 가람의 모든 걸 찢어놓는 것 같았다.


  가람이 현 청룡을, 그를 위해 살았다는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기는 했다. 어렸을 적부터 유일한 자신의 가족이었고, 이해관계라고 생각했던 탓에, 가람은 언제나 그의 눈에 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태어나던 해에 여의주를 품에 안고 꺄르르 웃었고, 걸음마를 떼던 해에 팔이고 다리고 한참이나 남는 수련복을 주워 입었다. 중학교도 가는둥 마는둥하며 언제나 도장에 틀어박혔고, 그가 웃어주는 걸 바라며 요리를 배웠더랬다. 한 순간에 가람이 지금까지 쌓아온 그 모든 것들이 산산조각이 나고, 세상이 무너졌지만 단 하나만을 위해 지금껏 살아오지 않았던가.



  “……, 당신을 여기에 영원히 처박으려고 온 거야.”

  “할 수 있을지나 모르겠구나.”



  그는 픽 웃으며 손바닥 위에 여의주를 소환했다. 언제나 푸르고, 환한 빛이 수도 없이 회전하는 그 구슬은 그의 손 위에서 빛이 다 죽어있었다. 색은 점점 탁해지더니 곧 검게 물들어버렸고, 더 이상 빛도 나지 않았다. 설마. 가람은 금방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여의주는 더 이상 나를 사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모양이로구나.”



  그러니 나를 여기에 처박을 수야 있나. 비린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가람은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네가 이곳에 오르자 생각했을 때부터 여의주는 더 이상 내 손에서 빛을 내지 않더구나.”



  툭. 여의주는 그의 손에서 떨어져, 가만히 가람의 발치로 굴러왔다. 가람의 발끝에 닿자마자, 여의주는 다시 색이 개이며, 희미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 색이 온전하게 돌아오고, 예전처럼 환한 빛을 내기 시작했을 때,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를 더 이상 어쩌지도 못하니 죽고만 싶겠구나.”



  네가 나를 위해 살아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 비통하겠구나. 그의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그는 가람의 인생 전체를 부정하고, 찢어 발겼다. . 속눈썹에 맺혔던 눈물방울이 가만히 떨어졌다.



  “물론, 네가 죽고 싶다고 아무리 발악해봐야 여의주가 너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고.”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잔인하고 잔인한 웃음소리. 가람은 몸을 틀어 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조그마한 주먹은 금세 그의 한 손에 잡혔고, 꼼짝도 하지 못했다. 으득,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맛이 났다. 울음이 섞여 짠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좋은 얼굴이구나.”



  가람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아니, 분노와 슬픔이 어거지로 뒤섞였다는 표현이 더 옳을 지도 모르겠다. 그의 손아귀에 잡힌 손이 아파왔다. 뼈가 어긋나고,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가만히 가람의 손을 놔주었다. 너는 이제 나를 어쩌지도 못할 것이고, 다음 후계자가 태어나 하늘에 오를 때까지 이곳에 남겠구나.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가람은 직감했다. 저 사람은, 나를 이곳에 영영 가둬두려는 생각이로구나.



  “……태어나면죽일 거잖아



  그가 호쾌하게 웃었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웃음이었다.



  잘 알고 있구나.”



  그를 올려다보는 가람의 표정이 참으로 복잡했다. 슬픔이 있었고, 분노가 있었고, 그리고 텅 빈 공허한 그 무언가가 있었다. 당신은, 지독하게 이기적이야. 조그맣게 속삭이던 그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에야 깨달을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을 텐데, 안쓰럽구나. 말을 할 때마다 입가에 주름이 깊게 패었다. 그는 가람에게로 등을 돌렸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지상으로 통하는 청룡문이 열렸다. 그는 가만히 문 앞에 섰다. 문이 열린 틈으로 강한 바람이 불어오다 곧 멎어버렸다. 그 둘을 제외한 세상의 그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그는 한 걸음을 청룡문 안쪽으로 들여놓았다. 가람은 그걸 멍하니 바라보는 채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가람을 돌아보았다. 어릴 적부터 지겹도록 보아온, 차가운 눈초리, 그 무엇도 담기지 않은 표정. 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어디 한 번, 이 하늘에서 행복해 보거라.”



  물론, 네가 그럴 수야 있겠냐마는. 문이 닫혔다. 그와 동시에 가람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땅을 짚은 손등에 자꾸만 눈물이 떨어졌다. 가람은 찬찬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가람은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숨을 죽여 울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은 아니었다. 죽고 싶었다. 그를 이곳에 처박으려 지금껏 살아왔는데, 그걸 바라며 이 하늘에 올랐는데, 그랬는데 더 이상 여의주는 그를 인정하지 않고, 그는 그렇게 지상으로 내려가 버렸다. 그는 이제 청룡 후계자가 태어나는 족족 그들의 숨통을 끊어버릴 것이고, 저의 바람과는 다르게, 그는 영원토록 행복할 것이며, 저는 이 하늘에서, 다시는 행복하지 못할 것이었다. 입술 사이로 자꾸만 울음이 새었다. 가람은 그렇게 아주 오랜 시간을 울고, 또 울다 제 곁으로 성큼 다가온 죽음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잠이 들 시간입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제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이던, 누군가의 목소리. 그 기억을 마지막으로, 가람은 죽음에 빠져들었다.





 

  멍하니 벌린 손바닥 위로, 벚꽃잎이 소복하게 쌓였다. 희고, 연한 분홍빛을 띤 꽃잎들이 모두 바닥에 떨어졌다. 가람은 아주 오랜 시간을 제 온실 안에서 보냈다. 계속해서 그 안을 걷고, 또 걸었다. 무언가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이 안에 무언가를 남겼으리란 기대도 하지 않았다. 가람은, 그저 가람은. 무작정 걷기만 할 뿐이었다. 제가 잠들어 있던 큰 벚나무의 위, 사람의 손 하나 타지 않은 꽃과 나무들. 가람은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온실의 문이 열리는 바로 앞엔, 노랗고, 빨갛게 물이 든 낙엽 몇 장이 떨어져 있었다.


  가람은 온실 밖으로 나갔다. 그 밖에서도 무작정 걷기만 했다. 은찬이 잠든 남쪽의 온실 앞에서 한 번 걸음을 멈추었다. 불의 주술을 쓰는 은찬에게는 퍽이나 어울리지 않는 잠자리인 듯 싶었다. 새파란 녹음이 드리워진 숲. 가람은 그 앞에서 은찬의 이름을 부를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다시 걸음을 옮겨 제 자리로 돌아갔다.





  사신이 되면. 사신이 되면 지상에서의 일은 모두 잊는다고, 했던가. , 아니. 잘못 들었을 수도 있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결국 그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가람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내가, 여기에 왜 올라왔더라. 새하얘진 머릿속에 길게 의문을 그리며, 가람은 조용히 지상에 싹을 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