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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붕(일지도 모르는 것)주의

트친 ㄷㄱ님 그림보고 그렸습니다..ㄷㄱ님 사랑해.......

둥굴레차!

백건X청가람

깊고, 깊은 밤

14.12.11







, , 내 몸에 손대지 말랬지, 백건!”



오늘도로구나. 양치를 하던 은찬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나와 푹 한숨을 쉬었다. 백건은 잠이 덜 깬 얼굴로 마당에 거꾸로 고꾸라져 있었고, 방 안쪽에선 가람이 빽빽 소리를 지르며 쿵쾅거리며 발을 굴렀다. 눈 위에 꼭꼭 자리를 잡고 있었을 안대는 한 쪽 끈이 풀려, 귀 한쪽에 대롱대롱 매달려 턱밑에 휘날렸고, 주먹을 흔드는 손이, 소리를 질러대는 얼굴이, 퍽이나 빨갛게 익어있었다. 지겹지도 않은가. 은찬은 어느새 벽에 기댄 채로 팔짱을 꼈다. 입에 물고 있는 치약에서 살짝 아린 맛이 나는 것 같았는데, 그걸 뱉어내는 것보다야 이걸 바라보고 있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나 오늘도 거실 나가서 잘 거니까, 또 내 옆에 누워 있기만 해!”



엄포를 놓듯, 가람은 꽤나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다섯 살 먹은 어린애에게 혼난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 마냥. 거꾸로 고꾸라져있던 백건은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잔뜩 인상을 구겼다. 맨날 춥다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오는 게 누군데? , 나 안 그랬거든! 니가 아니면 뭐, 내가 그랬을까봐? 가뜩이나 더워 죽겠는데! 밤마다! 그래서 내가 그런 거라고? 어이가 없어서……, 니가 그랬는지 내가 그랬는지 어떻게 알아! 투닥거리는-투닥보다 발악에 가까웠지만-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열 살이 되던 해에 백건과 치고 박고 싸우던 생각이 났다던지, 하여튼 은찬은 그걸 바라보며 추억에 젖어 있었다. 백건이 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어라 지껄이는지도 듣지 못하고.



본 사람이 있으면 어쩔 건데? , 주은찬. 넌 봤지? 넌 봤을 거 아니야!”



은찬의 입에 물려있던 칫솔이 떨어졌다. 잔뜩 굳은 백건의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뭐라도 좋으니까 지껄여봐.’ 은찬은 질색을 했다. 8년 먹은 친구의 편도, 알게 된 지 겨우 일 년이 지난 가람의 편도 들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제가 왜 이 말도 안 되는 말다툼에 끼었는지도 이해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은찬은 손을 내저으며 다급하게 대답했다.



너네 방에서 일어난 일을 내가 어떻게 알아!”



딱히 가람의 편을 들자고 한 대답은 아니었다. 거봐, 들었지? 가람이 씩 웃으며 백건은 내려다보았다. 바닥을 치던 백건의 주먹이 흙에 뽀얗게 덮인 것도, 몇 번이나 내려치던 그 바닥에 얕게 진동이 울리던 것도 은찬은 알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가람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그 사이로 베개를 끼웠다. 어깨에 무거운 이불을 둘둘 싸매고, 이마엔 안대가 씌워져 있었다. 감긴 눈이 둘, 뜬 눈이 둘. 마치 눈이 네 개 달린 모습 같아서, 백건이 픽 웃음을 흘렸다. 가람의 눈썹이 꿈틀댔다. 백건은 곧 입을 다물었고, 잘 가라며 손이나 흔들어주었다. 가람은 고대로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빼꼼 백건이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발밑으로 이불이 질질 끌리고 뒤뚱거리며 걷는 게, 영락없이 혼자 자는 것이 무서워 부모님의 방으로 숨어들어가는 꼬마애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그 새벽이었다. 백건은 문득 뒤척이다, 제 옆에서 울리는 휴대폰 진동에 잠이 깼다. 환한 액정에 언뜻 시간이 보였다. 새벽 두시 삼십 사분. 어떤 미친……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욕짓거리를 새며 백건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

, 무서운 꿈 꿨어…….”



슬픔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 백건은 퍼뜩 잠이 깼다. 휴대폰을 짚지 않은 손은 어느새 제 옆자리를 더듬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손에 잡히던 이불도, 요도 없다. 백건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대폰 너머에선, 여전히 슬픈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울음까지 섞여선.


벌컥 거실 문이 열렸다. 가람은 이불 속에 폭 숨어선 보이지도 않는 채였다. 이불 속에서 히끅거리며 우는 소리가 들렸다. 백건이 얼른 다가가 이불을 들췄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가람은 소리까지 내어 울고 있었다. 감은 눈 위로 힐끗 하이얀 빛이 비쳤다. 가람은 슬며시 눈을 떴다. 백건은 가람의 코앞에 제 얼굴을 가져다대고, 조용하게 물었다.



무서운 꿈 꿨어?”



언제고 들을 수 없는 더없이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 어린 애를 다루듯이, 백건은 조심스럽게 가람의 손을 붙들었다. 이 손을 잡을 때마다 하는 생각이었지만, 파르르 떨리는 손이 참으로 작고, 차가웠다. 가람은 얌전히 백건의 손을 맞잡았다. 여전히 울음을 흘리고, 백건의 손을 더욱 세게 감아왔다.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백건은 그게 못내 안쓰러워 가람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가람은 언제나 이랬다. 혼자 있는 걸 퍽이나 좋아하는 주제에, 어울리지도 않는 외로움을 탔다. 밤이면 밤마다 앓는 소리를 냈다. 흐느끼는 것 같기도 했고,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고, 마냥 의미 없이 하루에 있었던 일을 혼자서 되짚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가람은 잠을 깊게 자는 편이었지만 그만큼 꿈에서 헤어 나오지도 못했다. 가람의 그 앓는 소리 같기도 한 소리를 제대로 듣게 된 것은, 두어 달 전이었다. 언제나처럼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다 조용히 잠이 든 가람을 오래오래 바라보던 날. 그날따라 잠이 잘 오지 않았고, 계속해서 채 잠이 들지 않은 은찬에게 메시지가 왔고, 유난히 휴대폰 게임이 재미가 있던 탓이었다. 달뜬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고, 그래서 잠이 오지가 않았고, 그래서 가람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이었다. 잠이 오지 않았으니까. 그 방엔 단 둘 뿐이었으니까. 여느 때처럼, 저 어깨가 참 좁다, 고 생각하고 있었을 때 쯤, 방안에 가득 흐느끼는 소리가 들어찼다. 처음은 아주 작았다. 집중을 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가, 점차 소리가 커졌다. 파르르 떨리던 어깨가 들썩이고, 그리고 허공에 손을 뻗고 울음을 터뜨렸다. 반쯤 뜨여진 눈이 마주친 것은 가람이 몸을 뒤척이다 백건의 쪽으로 몸을 틀었을 때였다. 가람은 왈칵 울음을 토했고, 백건의 품에 안겨왔다. 어리광을 부리듯 그 품에 파고들며 계속해서 울음을 흘렸고, 쉬이 그치지 못했다. 울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고 쿨쩍거리기 시작했을 때, 그제야 가람이 웅얼거리며 말을 했다. 다음 날 기억하지 못했던 것을 보니, 그 또한 잠꼬대의 연장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


, 무서운 꿈을 꿨어.


말꼬리가 늘어지고 목소리에 주눅이 들어있었다. 백건은 그걸 가만히 들어주기만 했다.


꿈에, 그 사람이 나와서, 나를 쫓아왔어. 숨을 쉴 수도 없었고 도망칠 수도 없었어. 구석에 틀어박혀 그 사람이 점점 가까워지는걸 보고만 있어야 했어. 미안하다고 말했어, 잘못했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그런데, 그래도 소용이 없었어


방금까지 울던 게, 고작해야 잠꼬대나 하는 게, 퍽이나 말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입을 다물게 할 생각은 없었다. 가람이 먼저 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요 일 년 동안 단 한 번도 있지 않은 일이었다.


나를 미워하는 이유도 알 수가 없어,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아, 너무, 너무 무서웠어.


평소완 다르게 줄줄 말을 뱉어내는 게 퍽 우습고 신기해서, 백건은 하나하나 말을 시켰다. 가람은 울먹이면서도 꼬박꼬박 얌전하게 대답을 했다. 잠이 덜 깨면 사람이 달라지기라도 하는 건가. 백건은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이름이 뭐야? 청가람. 나이는 몇이야? 열여덟 살. 백건은 어떤 것 같아? 존나 짜증나. 백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본심이라도 나오는 모양이지. 그리고 백건이,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군데?


, 우리아빠아


그리고 백건은 그 모든 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내일 놀려주고자 했던 생각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조심스럽게 물었더랬다. 너 어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라 입을 다물긴 했지만.



……, 그 사람 꿈이었어?”



으응, 가람이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괜찮아?”



백건이 가람의 어깨를 도닥였다. 가람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아니, 안 괜찮아.



, 또 무슨 일인데?”



가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몸이 떨렸다. 오들오들 떨리는 몸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원체 몸에 열이 없기는 했다만, 오늘은 유난히 심했다.



추워?”



백건의 물음에,



, 추워.”



하고, 얌전하게 대답했다. 백건이 픽 웃음을 흘렸다. 암만 생각해도 이 차이는, 익숙해지지가 않을 것 같았다.



이리와, 방으로 가자.”



백건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백건의 손을 붙들고 있던 손이 자연스레 허공에 들렸다. 일어나, 방에 가서 자자. 백건이 가람의 팔을 흔들며 말하자, 가람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도리질을 쳤다. , , 뭘 바라는데. 확 몸을 숙여 눈높이를 맞추며, 백건이 물었다. 그제야 가람이 고개를 들었다. 잔뜩 베개에 비빈 얼굴이 새빨개 보였다.



안아줘, 백건.”



백건이 푹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사람 귀찮게 해……. 어느새 가람이 몸을 일으켜 활짝 팔을 벌렸다. 백건은 얌전히 그 품에 안겼다. 가람의 두 팔이 백건의 목을 죄고, 무게가 실렸다. 방으로 돌아가는 내내, 백건의 등을 두드리며, 따뜻하다, 따뜻하다, 하고 중얼거리는 게 다 들리는 줄도 모르고.


가람은 기어이 백건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제 이불에 가람을 뉘이고 거실에 두고 온 이부자리를 가져오려 몸을 일으키던 순간, 가람이 백건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며 중얼거렸다.



같이 자, 백건.”



따뜻하잖아. 톡톡. 제 옆자리를 두드리며, 가람이 슬쩍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백건이 이불 속으로 들어오자마자, 가람이 그 옆에 붙어 백건의 허리에 다리를 엮었다. 백건. 귓가에 조그맣게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짧게 대답하자, 무엇이 그리도 웃긴 건지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가 뒤따랐다. 백건, 백건. 또다시 이름이 불렸다. 가람은 낄낄거리며, 계속해서 백건의 이름을 불렀다.


가람은 새벽 네 시가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두움 속에서도,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리고, 얌전히 눈을 감은 가람의 눈두덩이가 보였다. 백건은 가람을 안은 팔을 끌어당겼다. 백건의 쪽으로 튼 얼굴이 바로 입술 앞까지 가까웠다. 백건은 가만히 가람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는, 좀처럼 멎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귀엽네, 청가람.”



말도 잘 듣고, 어리광도 부릴 줄 알고…… 눈을 다 가린 가람의 앞머리를 이리저리로 쓸어 넘기며, 백건이 조용하게 소리를 내 웃었다. 백건은 그러다 잠이 들었다. 제 코 앞에서 살살 풍겨오던 어린 아이들의 살 냄새와, 조용하고 부드럽게 골골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천천히.





 

백건!”



물론 그 다음날에 또다시 마당에 거꾸로 처박히게 되는 것은, 어제 미처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