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20화 대사 인용
미생
한석율X장그래
그는 취하지 않았다
14.12.20
원인터를 그만두고 삼 주. 호프집에서 만난 당신들은 참으로 반가웠다. 한잔, 두 잔 술이 들어가고, 못 다한 채 속에 쌓아두었던 이야기들을 풀고, 하나 둘 취하기 시작하고, 그리고 버스가 끊길지도 모른다며, 미안하다고 안영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먼저 가볼게요, 장그래씨.”
언제나처럼,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떠나는 그 등 뒤를 한참 바라보던 장백기는, 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한참을 비틀거리다 꼬인 혀로 안영이의 이름을 부르며 뒤를 쫓았다.
호프집에 남은 것은 나와 한석율. 당신. 둘 뿐.
“……장그래.”
당신이 나를 부른다. 노오란 조명 빛 아래, 눈앞에 쌓인 몇 병의 술이 흐트러져있고, 내가 따른 술잔은, 여전히 차올라 있었다. 네, 한석율씨. 퍽이나 취한 듯, 당신은 넥타이를 반쯤 풀어내고, 내 이름을 불렀다. 장그래, 장그래, 그래그래, 장그래. 언젠가 들었던 당신의 장난섞인 어투. 나는 거기에 슬며시 미소를 흘리며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장, 그래애…, 너 진짜, 니 마음속에 내가 무슨 직급이야.”
진짜로 말단사원이라, 그래서 말 안 해주는 건가? 사장이 아니고, 말단 신입사원이라서? 어? 내가 낙하산이야? 장그래, 대답해봐, 장그래. 내가, 낙하산이느냐구. 당신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흔들리는 손에 들린 술잔이 자꾸만 넘쳐흘렀다.
“한석율씨, 술, 넘쳤습니다.”
그러니 좀 먹어요, 일단. 자꾸만 팔이 후들거리는 당신께 다시 한 번 짠하며, 나는 술 한 모금을 들이켰다. 당신은 원샷. 언제나 그랬듯이. 당신의 잔에 다시 한 번 가득 술을 따르며, 나는 가만히 당신을 바라보았다. 내 이름을 부르는 저 입술이 좋다. 장ㅡ 하고 양 옆으로 길게 째지는 입술 틈이, 그ㅡ 하고 살짝 오무려지고, 래ㅡ 하고 내 마지막 이름을 부르며 벌어진다. 나는 당신의 입술이 움직이는 그 모양이 좋았다. 오버스럽게 나를 부르는 것도, 다정스레 불러주는 것도, 아니, 그저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 자체가 좋았을지도.
당신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장그래, 니 마음속에 나는 어디쯤이냐고오. 꼬부라진 혀로 나를 부르고, 풀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당신은 몇 번이고 되물었다. 한석율씨, 그만해요, 이제. 웃으며 대답을 피하고 다시 한 번 당신에게 술을 권한다.
“장그래, 대답해봐.”
집을 알지 못하니 바래다 줄 수도 없고, 집으로 데려가자니 엄마 잔소리가 무섭고. 호프집 근처의 모텔로 대충 업어오듯이 데려와서, 당신을 침대에 뉘여 놓았다. 덥다며 셔츠 단추 두 개를 풀어헤치고, 넥타이는 이미 다 풀려있고, 답답하다며 끌러낸 벨트가 저 바닥에 떨어졌다.
“한석율씨.”
침대 바로 옆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베개를 끌어안은 채 당신을 불렀다.
“……왜애, 장그래.”
술에 취해서 정신이 없어도 제 이름을 부르는 건 기가 막히게 알아들어선. 색색거리는 소리만 들리기에 자는 줄 알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당신의 이름을 불렀다. 한석율씨. 왜, 장그래. 한석율씨. 장그래, 왜 그렇게 불러, 자꾸. 투정에 가까운 당신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베개에 얼굴을 묻은채, 당신이 자꾸만 숨을 뱉었다.
“…장그래, 나 얼마나 마셨어?”
“…글쎄요, 많이 마셨죠.”
“우음… 장그래가 준 거야?”
“네.”
“…하하.”
실없는 웃음이 들렸다. 장그래, 장그래애. 술에 취한 당신을 보는 건 아주 오랜만이라, 나는 가만히 턱을 괴고 앉아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장그래, 이쪽으로 와, 같이 누워. 훽 한 바퀴를 돌아 옆자리로 돌아가더니, 나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여기, 여기, 내 옆자리이. 말꼬리가 늘어지고 말이 많아진다. 술에 취한 당신은, 어쩜 그렇게 술에 취하지 않은 당신과 달라진 것이 없는지. 나는 푹 한숨을 쉬며 얌전히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왜 거기에 있어, 장그래.”
일로와 누우라니까아? 말끝이 올라가는게 퍽 우스웠다. 여기쯤이면 돼요, 저는. 한석율씨 내일 출근 안해요? 묻자,
“출근… 출그은… 안해애, 그만 둘 거야.”
투정에 가까운 대답. 왜요, 왜 그만둬요. 가볍게 물으며 당신의 이마를 쓸었다. 장그래가, 없으니까… 술이 들어간 얼굴이 붉고, 이마가 뜨겁고,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한석율씨, 머리 많이 자랐네요. 으응, 곧 부활한다, 내 머리. 그러며 낄낄거리며 웃었다. 당신의 이마를 쓸어내리는 내 손목을 잡고서, 당신은 한껏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어있는 게 꼴 보기가 싫었는데, 당신이 손목을 잡고 있던 탓에 그걸 쓸어줄 수도 없었다. 당신은 나와 아주 오랫동안이나 눈을 맞추었다. 까만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그리고 속눈썹이 떨렸다. 장그래. 이따금 잊지 않으려는 듯 내 이름을 부르는 입술이 잔뜩 부르트고 찢어져있었다.
“장그래, 난, 진짜. 니 마음속에 자리가 없어?”
“아직도 그 얘기 하십니까?”
“…그거 대답 안 해주면, 나 안 잘 거야, 장그래.”
당신의 협박아닌 협박에,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있습니다, 한석율씨 자리.”
손가락으로 가슴 한구석을 가리키자, 당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있어? 진짜? 어디, 얼만큼인데? 나 얼마나 높은 직급이야, 장그래? 당신? 당신이요…. 가만히 침대에 뺨을 대고, 당신을 바라보았다. 이름 한 번을 부를 때마다 술냄새가 확 풍겼다. 나는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조용히 답해주었다.
“사원입니다.”
“……너무하네.”
“계약직 사원이요.”
계약지이익? 당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내가 고작, 내가 고작 그거밖에 안 돼?
“계약기간 끝났습니다.”
“……”
“그리고 재계약 했습니다. 방금.”
그래도, 고맙네. 머리맡에 있는 베개를 끌어와 거기에 얼굴을 묻었다. 귀까지 새빨개진 게 보였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서도 계속해서 꿍얼댔다. 이따금 들려오는 말이라고는 장그래, 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계약직이라니, 하고 한탄하는 것, 그래도 재계약이, 어디야, 하고 제 상황을 되짚는다던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껐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침대 위를 네모 각지게 비추고 있었다.
“잘 자요, 한석율씨.”
베개에 얼굴을 묻은 당신의 어깨를 바로 눕히고, 반쯤 드러난 당신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당신이 슬쩍 눈을 떴다가, 내 얼굴을 보곤 다시 질끈 눈을 감았다. 리플레이는 없습니다. 단호하게 말하자, 잔뜩 심술이 난 표정으로 볼을 부풀렸다. 내 목을 감아오는 팔을 떼어내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었다.
“서비스가 과하네, 장그래씨.”
“그러게 말입니다.”
“미안해서, 그래?”
가슴 한구석을 찌르는 당신의 말. 나는 거기에 고개를 저었다.
“좋은 꿈 꾸십시오, 한석율씨.”
내 굿나잇 인사를 마지막으로, 당신은 잠이 들었다. 손을 얌전히 이불 위에 모으고, 어느새 가슴께만 덮은 이불을 덮은 채, 달빛을 받으며 당신은 그렇게 잠이 들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당신을 아주 오래토록이나 바라보았다. 방 안엔, 내 숨소리와, 당신이 색색거리며 잠든 소리만이 들렸다. 아니, 이따금 당신이 잠꼬대를 했다. 장그래, 장그래, 하고 꿈에서조차 내 이름을 부르며. 그게 못내 우습고 미안해 나는 조용한 소리로 웃었다.
“한석율씨.”
잠든 당신을, 조용하게 불렀다. 당신은 정말로 잠이 든 듯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금 이름을 되뇌었다.
“한석율씨.”
돌아오는 거라고는 색색거리며 잠이 든 소리 뿐. 나는 거기에 슬쩍 안심했다.
“계약직 사원이니까, 계약 끝날 때까지 어디에도 못 갑니다, 한석율씨.”
그러니, 떠나지 마세요, 평생.
“절 떠나지 말아요, 한석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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