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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한석율X장그래

그는 울어버릴 것 같았다

14.12.21







장그래씨, 영화 좋아해?

, 좋아하는데요.

그럼 주말에 우리 집으로 올래? 나 프로젝터 샀거든.

 

씩 웃으며 하던 그 말에, 그냥저냥 고개를 끄덕였다. 집이 크다는 얘기까지야 들었다지만 프로젝터라…… 정말로 너무너무 미안하지만 집에 먹을 게 다 떨어졌으니 뭐라도 좀 사다달라던 그의 말에 양 손에 피자와 치킨을 들고 간 나는, 그의 집 현관에서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 왔어, 장그래?”

 


완벽한 공간. 그 이외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널따란 거실이 있고, 오픈된 주방이 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화장실엔 욕조가 딸려있고, 2층으로 이어진 계단 위엔 침실이 있고, 서재로 보이는 방 하나가 더 있고…… 뭐하고 있어, 장그래? 들어와. 그가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두드리지 않았다면, 아마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을 것이다.

 

 




취향 하고는……. , 하고 혀를 차자,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내 어깨를 쳐왔다.

 


뭐야, 장그래. 표정이 왜 그래? 로맨스 영화 싫어해?”

프로젝터 샀다고 집까지 오라더니, 로맨스 영홥니까?”

, 빨간 비디오라도 상상했나?”

그런 게 아니고……!”

일단 앉아, 앉아. 고구마 피자 사왔네? 역시 장그래, 내 취향을 꿰고 있어~”

 


억지로 어깨가 찍어 눌린 탓에 소파에 주저앉듯 털썩하고 앉혀진 꼴이 되었다. 당신은 나를 보며 찡긋 남사스러운 윙크를 하고 내 옆자리에 풀썩 몸을 기댔다. 바로 옆의 당신에게선 달큰한 냄새가 났다. 한석율씨, 향수 바꿨습니까? 너무 독한데.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당신은 눈이 커다래져서는 소리를 높였다.

 


장그래, 나 향수 바꾼 거 어떻게 알았어? 역시 나한테 너무 관심이 많다니까.”

이렇게 독한데 못 알아차리는 게 이상한 거 아닙니까.”

으음, 아냐아냐, 숨기지 마, 장그래. 다 아니까.”


 

징그러운 미소. 나는 거기에 질색을 하며 볼륨을 높였다.

 


영화는 별 것 없는 내용이었다. 죽어버린 연인을 살리기 위해 몇 번이나 시간을 되돌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남자의 죽음을 막고자 했다. 남자의 첫 죽음은 교통사고였다. 여자는 한 번 시간을 돌려 교통사고가 날 뻔 한 남자를 구했지만,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정집 난간에서 떨어진 화분에 머리가 깨져 죽어버렸다. 여자는 아주 오랫동안이나 울며 남자의 손을 부여잡고 자기를 믿으라고 말했다. 남자는 차에 치이지도, 화분에 머리가 깨지지도 않았다. 그 대신 남자의 곁을 스쳐지나가던 소매치기범의 칼에 배를 찔렸다. 다시 한 번 시간이 돌아갔다. 여자는 남자의 걸음을 돌렸다. 반대편 거리에서 소매치기범이 나타났고, 여자는 애써 흐르는 웃음을 꾹 참았다. 여자는 무사히 남자를 집까지 바래다주었고, 다음을 기약하며 잠이 들었다. 남자의 사망소식을 들은 것은 그 날 새벽이었다. 남자의 집에 금품을 훔치러 들어온 강도가 남자를 살해한 채 도주했다. 그 후에도 남자는 수십 번이나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여자는 그 때마다 남자를 붙잡고 미안하다고 말했고, 그럼에도 여전히 자기를 믿으라고 말했다. 여자는 계속해서 시간을 돌렸고, 셀 수 없이 많은 남자의 죽음을 봐야만 했다. 결국 여자는 남자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시간을 돌리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남자는 더욱 잔인하게 죽어버렸다. 토막 난 시체로 어느 강 하류에서 발견되기도 했고, 문이 잠긴 방 안에서 불에 타 화재로 죽어버리기도 했다. 결국 여자는 남자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내버려두어야 했고, 남자의 손을 붙들고, 그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 뺨을 어루만지며 부디 행복하게 살아달라는 남자의 말에 뚝뚝 굵은 눈물만 흘렸다. 수십 번이나 반복된 남자의 죽음. 영화가 거의 끝나갈 때 쯔음, 당신은 툭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한석율씨. 무겁습니다.”


 

당신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한석율씨. 엄한 목소리로 다시 당신의 이름을 부르자 당신은 살짝 고개를 떼는 듯 했다. 그리곤 나를 바라보았다. 장그래. 언제나 톤 높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던 당신은, 그 언젠가, 머리를 잘랐을 때와 똑 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장그래.”

 


당신은 울고 있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잔뜩 슬픔에 젖어있었다. 나는 얌전하게 대답했다. 소파 등받이에 걸고 있던 팔이 내 어깨를 감싸왔다. 불쑥 얼굴이 가까워졌다. 코가 닿을 듯 가까운 거리, 한 번 숨을 쉴 때마다 당신에게 숨이 닿는 것 같아서, 나는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내내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당신이 푹 고개를 숙였다. 물씬, 진한 샴푸냄새가 퍼졌다.

 


장그래는, 내가 죽으면 어떨 거 같아?”

왜 그런 걸 물어요, 한석율씨. 술 취했습니까?”

 


테이블에 다 마신 캔 맥주 두 캔이 나뒹구는 게 보였다. 나한텐 주지도 않더니…… 언제 다 마셨대. 슬쩍 인상을 찌푸리자, 내 생각을 다 읽은 듯, 당신이 실실 웃음을 흘리며 내 어깨에 고개를 박았다.


 

한석율씨, 혹시

술 안 취했어, 장그래.”


 

단호하게 대답하고, 그리고 나를 밀어낸다. 단단히 심술이 난 듯이, 당신은 내게서 멀찍이 떨어져서 앉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익숙한 몇몇 배우의 이름이 보이고, 영화를 보는 내내 지겹게 들었던 배경음악이 흘렀다. 한석율씨. 조심스럽게 당신의 이름을 부르자, 당신은 휘휘 고개를 젓더니 가볍게 두 손으로 제 뺨을 문질렀다.

 


, 안 되겠다.”


 

당신은 짧게 중얼거리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앞을 스쳐지나가는 당신의 걸음걸이가 약간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한석율씨, 어디가요?”

 


대답도 안 해 줄 것 같이 굴더니만. 이름을 부르며 묻자, 당신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뒤돌아보았다.

 


나 얼굴 빨간지 보려고.”

안 빨간데요.”

아니, 취한 것 같아서

 


맥주를 몇 병을 마셔도 멀쩡한 사람이……. 나는 짧게 혀를 찼다. 화장실 문이 닫혔고, 수도꼭지를 트는 소리가 났다. 나는 얌전히 앉아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는 것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두 조각 남은 피자와, 뼈랑 부스러기밖에 안 남은 치킨. 로맨스 영화를 보기엔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꾸역꾸역 다 먹어주려고 한 게 괜히 고마웠다. 나는 멍하니 꼭 닫힌 문고리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죽으면 어떨 것 같느냐고? 저렇게 삐칠 걸 알았으면 대답이라도 해 줄 걸 그랬다. 나는 턱을 괴고 한참이나 당신이 나오길 기다리다, 천천히 이름을 불렀다.

 


한석율씨.”

 


굳게 닫힌 문 너머로 장그래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그지 않은 수도꼭지에서는 여전히 뜨거운 물이 나오는 채였다. 푹 숙였다 들은 얼굴엔 붉은 기가 돌았다. 이상하네, 나 분명 많이 먹지는 않았는데. 다시 한 번 가볍게 제 뺨을 두드렸다. 손님을 초대해놓고 혼자 취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그냥 손님도 아니고 장그랜데. 한석율씨. 다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어, 장그래.”

 


수도꼭지도 잠그지 않았고, 워낙에 작은 목소리로 답한 터라 들리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대답했다. 이름을 불렀으니까. 그리고 다시 한 번 모기만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는 게 들렸다. 한석율, 한석율씨. 어쭈, 이제는 말 깐다 이거지. 휘휘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 번 대답했다. 왜 자꾸 불러, 장그래. 그렇게 한 열댓 번은 더 부른 것 같다. 한석율씨. 한석율씨. 한석율씨. , 장그래. , 장그래. 정들려고 부르는 거야, 장그래? 참 이상한 일이지. 술에 취하기는 취한 모양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다니.


벌컥 문이 열리기 전엔 그랬다.

 


한석율씨.”


 

당신은 수도꼭지를 잠그지도 않고, 세면대에 팔을 기대어 거울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석율씨, 뭐하고 있었습니까? 나오지도 않고. 묻자, 당신은 멋쩍은 듯 웃으며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아니, 그냥……


 

그러다 문득 생각이라도 난 듯,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여기까지 왔어. 기다리면 알아서 갈 텐데.”


 

해줄 말이 있어서요. 그 말은 입속을 맴돌았다. 나는 짧게 숨을 한 번 뱉었다. 내 입에서 나올 말이 기대라도 되는 듯, 당신은 잔뜩 기대에 부푼 얼굴이었다. 한석율씨. 나는 다시 당신의 이름을 불렀다. 당신은 대답대신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슬플 것 같습니다.”

?”


 

기대도, 예상도 못했다는 듯. 당신은 아주 오랜만에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입술이 엇나가고 눈이 풀린다. 고개가 한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눈썹을 가린 앞머리가 천천히 떨어졌다.

 


한석율씨가 죽으면, 슬플 것 같다구요.”


 

나는 미소를 지었었던 것 같다. 입꼬리를 올리려고 무딘 애를 썼다. 이건 슬픈 이야기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속삭이면서. 당신은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요.”

 


딸꾹. 만취해도 나오지 않던 딸꾹질을 했다. 제가 딸꾹질을 할 줄은 몰랐던 건지, 당신은 얼른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빨리 나와요, 저거 치워야죠. 나는 그런 당신을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 대체 어디에다 대답을 한 건지 알고는 있는지. 그제야 수도꼭지가 잠겼고, 완전히 끝나버린 TV 화면이 새까맣기만 했다. 다 마신 맥주병을 구기고, 한 모금 남은 콜라를 입에 물었다. 테이블 위에 있는 채 먹지 못한 피자 두 조각을 제외한 걸 다 치울 때까지 당신이 여전히 나오지 않아서, 나는 화장실을 향해 낮게 소리쳤다.

 


한석율씨, 죽었습니까?”


 

언뜻 문 밖으로 비친 당신의 얼굴이, 새붉게 물들어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