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de-image

R-15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썰)






둘이서 거하게 술을 먹은 날이었어. 저는 말술이니 계속해서 장그래에게 술을 권했고, 장그래는 주니까 넙죽넙죽 받아먹었지. 그렇게 둘이서 술잔을 기울이고 두어 시간이 지났을 때였나. 먼저 정신이 나간 건 장그래였어. 한석율이 폭탄주다 뭐다 하면서

 

이것저것을 섞어주고는 했는데, 그게 맛있어서 맛있다고 벌컥벌컥 마시다보니 제 주량이 훌쩍 넘어버린 거였지. 장그래는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서 잠이 든 것 같았어. 한석율이 자꾸만 장그래의 이름을 불렀지. 장그래, 장그래. 장그래는 대답하지 않았어.

 

아니, 애초에 대답할 정신이라도 있었던가. 하여튼 완전히 정신을 잃은건지 손가락 세 개를 흔들며 이게 몇 개냐고 묻는 한석율에게 계속 중얼거렸지. 집에 가야 한다고. 한석율은 장그래가 어디사는지 알 수도 없었거든. 택시 태워 보내기도 불안하고,

 

그렇다고 이렇게 만취상태로 정신이 없는데 이걸 그냥 보내기는 왠지, 예의가 아닌 것 같은 거야. 한석율이 장그래의 등을 두드리며 물었어. 장그래씨, 우리집으로 갈래요? 본심이 뚝뚝 묻어나는 말이었는데, 평소라면 냉정하게 내치며 싫다고 말했을 장그래가

 

술에 취해서 얌전히 고개만 휘휘 저으며 네? , .. 집에 가야 하는데.. 하고 나오니 더 오기가 생기는 거야. 뭐랄까.. 나쁜 마음? 그런 거였지. 한석율의 입가에 씩 미소가 걸렸어. 그러니까 가자구요, 우리 집에. 우리 집. 그 단어에 장그래가

 

흔들렸지. ? 집에 가요? 평소보다 더 멍청해지고 정신도 못차리더라. 한석율이 사람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어. 그래, 가자, . '우리' 집에. 한석율은 제 몸도 못가누는 장그래를 똑바로 앉히고, 조심스럽게 벗어던진 코트에 팔을 꿰주었지.

 

다리에 힘까지 풀린 장그래 팔을 어깨에 두르고, 지갑을 열었어. 94천원입니다. 가볍게 카드를 꺼내 결제하며, 한석율이 택시를 잡았어. 안에 장그래를 밀어넣고, 뒤따라 탔어. 아저씨 XX동으로 가주세요. 익숙한 제 집 주소를 불러주며, 한석율은

 

창문에 머리를 박고 잠든 장그래를 바라봤어. 어찌나 예쁘게 자던지. 택시 기사가 보지 못하게, 무릎 아래에서 장그래의 손을 맞잡고 바르작거렸지. 으응, 술에 취한 장그래는 여전히 잠이 든 채였어. 아무것도 모르고. 제 집에 도착해서, 한석율은 곧장

 

장그래를 소파에 눕혔어. 널브러져서 누워있는 꼴이 참 보기좋았지. 한석율은 얌전히 장그래의 배 위에 올라탔어. 택시에서 내릴 때부터 덥다고 코트를 벗어던진 통에 코트를 벗길 수고를 할 필요도 없었지. 한석율이 가만히 장그래의 목을 죄는 넥타이를

 

풀었어. 넥타이가 길게 늘어져 손끝에 걸렸지. 장그래. 한석율이 가만히 이름을 불렀어. 장그래가 무거운 눈꺼풀을 올렸지. 으음, 하고 입밖으로 투정이 새어나왔어. 한석율은 얌전히 허리를 굽혀 장그래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댔어. , 하고 바람을

 

불어 넣으니까 간지럽다며 몸을 배배 꼬았지. 장난은 거기서 관두고, 한석율이 가만히 장그래에게 속삭였어. 장그래씨, 이 일, 내일 기억할 거에요? 필름 다 끊긴 사람한테 하는 말치고 퍽이나 예의를 차린 말이었지. 일부러 그렇게 물어보는 게 틀림이

 

없었는데, 이미 꽐라가 된 장그래가 그걸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지. 제 엄마가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던건지, 장그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어. 술에 취한 탓에 혀가 꼬여서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는데, 아마 아니요,

 

라고 대답했겠거니 했어. 한석율이 씩 웃었지. 되도록이면 기억하지 말아요, 장그래씨. 그렇게 말하며, 툭 툭 장그래의 셔츠단추를 풀었지. 난 나쁜 사람 되기 싫거든. 단추를 끝까지 풀어내고, 버클을 풀었어. 벨트가 바닥에 떨어지며 버클이 깨지는 소리가

 

났지. 한석율이 슬쩍 인상을 찌푸렸어. 작지는 않았던 소리라, 장그래가 슬쩍 몸을 뒤척이다 다시 색색 숨을 뱉었지. 한석율이 씩 미소를 흘렸어. 장그래, 하고 신이 난 듯 이름을 불렀지. 역시 장그래는 대답이 없었어. 한석율이 가만히 장그래의 손목을

 

움켜쥐고 얌전히 그 안쪽에 입을 맞췄어. , 하고 외설스러운 소리가 났어. 한석율은 일부러 소리를 더 크게 냈어. 입술이 손목에서 떨어질 때도 소리가 났는데, 제 입으로도 쪽 하는 소리를 냈지. 한석율은 몸을 숙여 장그래의 이마에서부터 눈꺼풀, 콧대

 

귓불, 턱끝에 짧게 쪽쪽거리며 입을 맞추고 슬쩍 고개를 올려 장그래의 입술을 깨물었어. 키스 할 생각은 없었지. 그건 나중에 맨정신으로 할 셈이었거든. 하여튼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고 살짝 혀로 핥아올리고 다시 눈꺼풀에 입을 맞췄어. 장그래가 슬쩍

 

눈을 뜬 것도 그때였지. 한석율씨? 잔뜩 졸음이 섞인 목소리에 한석율은 당황하기는 커녕 씩 웃었어. , 장그래, 잘 잤어? 장그래는 한석율이 제 위에 올라타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어. 그냥 얼굴이 가깝네, 한석율씨 왜 이렇게 가까이 있어요,

 

정도에 그쳤지. 한석율씨, 여기가 어딥니까. 느리고, 푹 잠겨버린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어. 한석율은 검지를 장그래의 입술에 가져다댔어. 여전히 뻔뻔스럽게 웃는 얼굴이었지. , 장그래. 좋은아침, 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얌전한 인사였지. 장그래가 눈살을

 

찌푸리며 손등으로 제 눈을 비볐어. 여기... 어딥니까.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고개가 돌아갔지. 소파 바로 앞에 커다란 TV가 있었는데, 검게 꺼진 스크린으로 사람 두 명의 실루엣이 보였어. 여전히 잠이 덜 깬 탓에 그게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실눈을

 

뜨고 가만히 그 스크린에 시선을 집중할 때였어. 한석율이 장그래의 뺨을 붙잡고 밀며 저와 똑바로 바라보게 만들었지. 갑자기 돌아간 목에, 장그래가 확 짜증을 내는 것 같았어. 쉬잇. 한석율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장그래의 입을 틀어막았어.

 

어디긴 어디야, 장그래. 여긴 꽃밭이지. 한석율은 여전히 뻔뻔스럽게 웃고있었어. 내내 놀고 있던 손 한쪽이 슥 아래로 움직였지. 셔츠 안으로 들어간 차가운 손이 한참이나 배꼽근처를 바르작댔어. 지금 , 뭐 하시는..! 어떻게든 한석율을 밀어내려고

 

했는데, 술에 취해서 팔이고 다리고 하나도 힘이 들어가지가 않았어. 한석율은 어깨만 으쓱하더니 글쎄, 하고 말꼬리를 늘였지. 장그래, 내가 뭘 할 것 같은데? 장그래가 살짝 신음을 흘렸고, 한석율의 차가운 손이 단단히 허리를 쥐었어. 잘 생각해봐,

 

장그래. 조그맣게 제 귀에 속삭이는 그 목소리에, 기어이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