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de-image



언제나처럼 가람이의 홍알대는 잠꼬대소리가 들리던 날이었어. 또다시 곁에서 거슬리는 잠꼬대 소리가 나서 옆쪽으로 발길질을 했는데, 왜인지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어. 백건은 가만히 몸을 일으켰지. 제 곁엔 조그마한 어린애가 누워 있었는데, 한참이나 울다

 

잠이 들었는지 얼굴에 눈물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어. 그런데 참 어디에서 본 것 같은 얼굴인 거야. 너무 익숙하게 생겨서, 백건은 한참을 고민했어. 가람이었어. 힘없이 풀려버린 손가락이랑, 곱게 감은 눈이랑,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 무슨 영문인진 알수

 

없었지만 분명히 청가람이었어. 백건은 멍하니 그걸 바라보고 있었지. 그 조그만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샜어. 아빠, 하고 작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문 밖에선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지. 소파에 여자와 남자가 앉아 서로를 마주보며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어

 

백건은 가만히 그걸 바라보고만 있었어. 남자는 여자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환하게 웃기도 하고 대답도 해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어. 그리고 여자의 입에서 '우리 가람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지. 백건은 전에 없던

 

위화감을 느꼈어. 당신은 언제나 청가람 이야기만 하는군. 남자의 표정이 확 식어버리자, 여자가 어색하게 웃는게 보였지. 백건은 다시 고갤 돌려 제 등 뒤에 몸을 말고 자고 있는 가람을 보았어. 가람은 여전히 아빠를 부르고 있었지.

 

단편적인 기억들이 보였어. 외면당하고, 무시당하고, 끝내 울음을 터뜨렸지. 가람은울 때조차 아빠를 불렀어. 단 한 번도 자기한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는데 말이야. 남자가 떠난 식탁을 지키고 앉아 젓가락으로 이 반찬 저 반찬을 찔러보는 게 보였어.

 

남자의 앞에서, 가람은 퍽이나 수다스러워졌어. 아무 영양가도 없는 날씨얘기에서부터 시작해 제 학교 생활까지 줄줄 늘어놓는 걸 보며 신기하다 싶었지. 저와 같은 방에 사는 가람은 일단 선부터 긋고 경계를 했거든. 그런데 그 모습이 참, 불쌍한 거야.

 

남자는 가람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 날이 참 춥죠. 오늘 눈 올 지도 모른대요. 정적이 흘렀지. , 저번 주엔 학교에서 대련을 했는데, 거기서 제가 이겼어요. 그 중엔 3학년 선배도 있었는데... 줄줄줄 늘어놓는 이야기엔, 여전히 묵묵부답.

 

남자가 대답해주지 않으면, 가람은 풀이 죽었어. 그래도 계속해서 말을 걸었지. 가람은 참 필사적이었어. 도장에서 남자와 가람이가 수련을 하는걸 보았어. 아니, 그걸 수련이라고 할 수나 있나. 백건은 문득 제 아버지와 수련하던 날이 떠올랐어. 아버지는

 

웃으며 백건을 짓밟았지만, 이런 느낌은 아니었어. 뭐랄까... 진심이 묻어난다던지... 가람에게 주먹을 꽂는 그 것은 분명히 살기를 띠고 있었어. 가람은 아슬아슬하게 그걸 피하며 반격했지. 남자는 마치 가람이를 죽이기라도 할 것 같았어.

 

저건 그냥, 화풀이 아니야? 오죽하면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서너 시간이 지나자 옷이 너덜너덜해져선 가람이 가쁜 숨을 뱉었어. 감사, 합니다, 라는 말도 채 끝맺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버렸는데, 남자는 냉정하게 뒤를 돌아 제 갈길을 가더라. 가람인 또

 

그 뒤를 쫓았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비척대면서, 어떻게든 그 뒤를 쫓겠다고 열심히 걸어갔어. 더이상 보고싶지도 않았어. 아니, 꿈이라면 차라리 깨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가람이는 필사적이었어. 남자의 시선이 제게로 닿길 바라며, 열심히 노력했지

 

물론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가람이는 정말로 열심히했어. 가람이가 무술에 유난히 강하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기도 했지. 기억들은 조금씩 흘러갔는데, 남자는 여전한 태도였어. 가람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았어. 가람은 그 뒤를 쫓았고

 

계속 아빠, 하고 부르며 그 옷자락을 쥐었지. 아니, 그걸 쥐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어. 그저 남자가 보지 않을 때 슬쩍 손가락 끝을 대보는 정도였지. 그러던 어느 한 때의 기억이었어. 여자가 가람이의 손을 붙들고 축하해, 가람아, 하고 환하게 웃었지

 

그리고 백건은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어. 여자가 잠이 들고 난 새벽. 남자는 가람의 방으로 들이닥쳐 곧장 가람의 멱살을 잡았지. 가람이의 손이라도 꺾어버릴 듯 손목을 쥔 손에 힘을 빼지 않았어. , , 벌어진 입술사이로 애타게 부르는데도 남자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어. 베개에 머리가 박혀 비명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어. 남자의 손 위로 여의주가 나타났고, ... 끔찍한 장면이었어. 가람이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지. 여의주에서 얇은 번개가 나타난 것까지는 볼 수 있었어. 그게

 

가람이를 향했던 것까지는 봤는데, 그게 너무 잔인하고 마음이 아파서 고개를 돌려버렸어. 손끝이 움찔거리며 신음을 뱉었어. 끅끅거리는 울음이랑 섞여 참 비통하게 들렸지. 남자는 죽어버린 벌레라도 바라보듯 가람이를 내려다보더니 짧게 혀를 찼어. 남자가

 

나간 방안엔 가람이만 남았지. 가람이는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한껏 몸을 웅크렸어. 울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워버렸어. 백건은 멀쩡한 정신으로 그걸 바라볼 자신도 없었지.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어. 등이 흥건히 젖었고, 갑작스레 눈물이 났지. 백건은

 

오랫동안 소리를 죽여 울었어. 왜소하게 굽은 가람이의 등을 바라보았어. 그 때의 잔해인지, 여전히 몸을 웅크리고 잠이 들었지. 아빠. 환한 목소리로 남자를 부르던 가람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어. 잔인하고 잔인한 기억. 백건은 차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하루를 꼬박 새웠고, 다음 날 멍한 눈으로 가람이가 깨어나는 걸 바라보았지. 뭐야, 백건. 짜증스런 말이 돌아왔지만 백건은 대답하지 않았어. 그 후로 몇주나 백건은 그 꿈을 잊을 수가 없었어. 덧붙여 가람의 뒤를 쫓는 백건의 시선이

 

퍽이나 슬퍼보였지. 동정이 담긴 것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아주 많이 미안해보였어. 자기 잘못도 아닌데, 저한테 잘못이라도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