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이 열여덟이던 때, 시험 기간에만 찾는 도서관이 있었어. 자리도 널찍하고 꽤나 깊은 곳에 있던 데라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었지. 가람은 그게 퍽이나 마음에 들었어. 공부하다 졸리면 잠도 잤고, 짐도 두고 나가서 밥도 먹다오고 했거든.
언제였더라. 5월 말이었을 거야. 중간고사 마지막 날을 앞두고, 끄적끄적 놀고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펜을 쥐었지. 한참이나 앉아 공부를 하는데 드륵, 하고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렸어. 한참 집중이 잘되던 터였는데 그 소리 하나로 모든게 깨져버렸지.
사실 변명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집중이 깨진건 그 탓이었어. 가람이 확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지. 대학생인지 뭔지 머리를 하얗게 물들인 사람이 보였어. 노트북 때문에 얼굴까지는 보이지 않았지. 가람은 다 보이도록 인상을 쓰며 머리를 헝클어뜨렸어.
좀 우스운 생각이었지만 자기가 화난 걸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지. 건너편에 앉은 남자는 가람에겐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았어. 경영의 이해. 딱 봐도 두꺼워 보이는 책이 하나, 둘, 셋. 널따랗게 펼쳐진 책들을 바라보며 입을 벌렸지.
결국 가람은 그 날 해가 지도록 자리에 앉아 건너편에 앉은 남자의 얼굴이나 훔쳐보다, 되려 지금까지 공부했던 걸 다 까먹고는 집으로 돌아갔지. 자리에서 일어서며 노트북에 가린 그 얼굴을 봤는데, 초췌해가지고는, 콧대에 걸친 보라색 뿔테 안경밖에는
보이지가 않았어. 시험이 끝나던 날, 가람은 귀찮게 밥이나 먹자느니 노래방이라도 가자느니 하는 친구들의 말을 모두 무시하곤 다시 그 도서관엘 갔지. 시험이 빨리 끝났던 터라 도서관 또한 사람이 없었어. 딱 한명, 보였지. 어제랑 똑같은 옷차림.
똑같은 뿔테안경. 가람은 대충 책장에 꽂혀있는 책 하나를 뽑아들고 남자의 건너편엘 가 앉았지. 남자가 힐긋 가람을 바라보는게 보였지. 샛노란 눈이었어. 처음으로 사람의 눈이 예쁘다는 생각을 했지. 가람을 책을 펼쳐놓고 그 위로 힐긋 남자를 바라보았어.
남자는 진지한 얼굴로 연신 책과 노트북 화면을 번갈아 바라보았지. 타닥, 하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어. 가람은 그날도 오래오래 남자를 훔쳐보고, 집으로 돌아갔지.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랬어. 가람은 며칠째 그 남자의 맞은편에 앉아
책을 펴고 앉아 그 위로 남자를 훔쳐보았지. 꼬박 이 주일이 지나던 날이었나. 언제나처럼 책을 가지고 와 자리에 앉으려는데, 책상 위에 음료수 캔 하나가 놓여있는 거야. 가람이 가만히 캔을 집었어. 맨날 오네. 공부 안해? 휘갈겨쓴 글씨. 누군진
몰라도 성격한번 더럽겠구나 했어. 그리고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직감했지. 당신이에요? 가람이 입모양으로 물었어. 남자가 피식 웃었지. 그러면 어쩔건데. 낮게 울리는 목소리. 가람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자리에 앉았어. 책은 제쳐두고, 가방 안에 있던
노트 하나를 꺼내서 글씨를 끄적였어. 이거 왜 주는 거에요? 나 먹으라고? 아저씨 나쁜 사람이에요? 깨알같은 글씨는 제 나이답게 조그맣고 귀여웠어. 남자의 앞으로 밀어넣은 노트를 보고, 남자가 푸, 하고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릴 냈지. 그리고 가람의
손에 들려있던 펜을 뺐어갔어. 가람의 글씨 밑에 한 글자, 한 글자를 적어내려갔지. 아저씨 아닌데. 나쁜 사람도 아니야. 노트 위에 펜을 올리고, 남자가 노트를 가람의 앞으로 밀었지. 한동안 노트 위의 글자로, 대화가 이어졌어.
그럼 이건 왜 주는 거에요? 나 먹으라구? 학생이 책 열심히 읽는 것 같아서. 나 알아요? 알지, 청가람. 어떻게 알았어요? 니 이름표. 가람이 힐끗 제 가슴팍을 쳐다봤지. 청가람. 이름 선명하게 새겨진 이름표를 얼른 떼어냈어. 아저씨 이름은 뭐에요?
말 안해줄건데. 왜요, 내 이름 알잖아요, 말해요. 아저씨 아니라서 말 안할거야. 쓸데없이 따지긴. 니가 이 나이 먹어봐, 아저씨란 말에 신경이 쓰이나 안쓰이나. 몇살인데요? 넌 몇살인데.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요, 아저씨 몇살이에요. 글쎄. 몇살같아?
몰라요. 스물 아홉? 너 내 책 안보여? 보이는데, 그렇게 공부 잘 할 것 같지는 않아서. 스물 다섯. 넌 몇살인데? 몇살같아요? 장난치지 말고. 열 여덟이요. 공부안해? 해요, 나 꽤 잘해요, 공부. 몇등이나 하는데. 삼등이요. 그렇게 안생겼는데.
그쵸, 그렇게 안생겼죠? 미안해요, 뻥 좀 쳤어요. 근데 3등 맞아요, 나 뒤에서 3등하는데. 반? 아뇨, 전교. 농담이지? 진짠데. 아저씨 왜 안믿어줘요. 나 아저씨 아니라니까. 나보다 일곱살이나 많은데? 그럼 아저씨죠. 난 위로 두살 이상이면 다
아저씨라고 쳐요. 너 어디가서 예쁨은 못받겠다. 왜요, 내가 얼마나 예쁨받고 자랐는데. 웃기고 있네, 이 성격으로? 아저씬 퍽이나 그런 성격으로 사회생활 잘도 하겠네요. 일주일만에 짤리겠어. 너 지금 나한테 시비터냐. 아닌데요, 내가 왜 모르는
아저씨한테 그러겠어요. 나 되게 착한 앤데. 웃기고 있다. 니가? 남자가 힐긋 가람일 바라봤어. 가람인 어디서 배워왔는지 애교랍시고 손으로 턱을 받쳐 꽃받침을 만들었지. 남자가 멈칫했어. 그게 퍽이나 귀여웠거든. 가람이가 남자가 멈칫한 걸 봤어.
그리곤 입을 틀어막곤 웃었지. 봐요, 아저씨 지금 좀 귀엽다 싶었죠? 내가 그렇다니까. 어울리지도 않게 아줌마처럼 손을 내젓는 가람일 바라보며, 남자가 으득 입술을 깨물었어. 아, 예. 뒤에서 3등하시는 청가람학생. 집가서 공부나 하지?
안그래도 그럴거거든요, 아저씨가 말만 안걸었음 진작 여기서 문제집펴고 공부했지. 가람이가 책상위에 올려져있던 음료수를 따 한번에 목구멍으로 넘겼어. 갈 거야? 자리에서 일어나는 가람일 바라보며 남자가 물었지. 당연하죠, 집가서 공부할건데. 여기서
한다며. 남자가 되물었어. 미안한데 나 원래 가방에 아무것도 안들고 다니자는 주의거든요. 가람이 자랑스럽게 가방을 열어 남자에게 보여줬어. 정말 가방은 텅텅 비어있었어. 자세히보니, 가람은 실내화를 신고있었지. 남자가 피식 웃었어. 그거 신고가?
왜 당연한 걸 물어요? 가람이 당연하다는 듯 말하며 등을 돌렸지. 내일도 오냐? 어느새 말까지 놓은 남자의 물음에, 가람이 절레절레 고갤 흔들었어. 안 와요, 왜? 내일 소풍가거든요. 가람이 멀어지며 손을 흔들었어. 남자도 몸까지 돌려 가람이 떠나는
걸 보며 손이나 흔들어주었지. 근데 아저씨, 이름이 뭐에요? 저 멀리서 앳된 목소리가 들렸어. 가까이서 들을땐 몰랐는데, 멀리서 소리지르는 걸 들으니 확실히 애는 애인거야. 피식 웃음이 나왔어. 조그마한 소리로 답했지. 백건이야. 백건. 다시 가람이가
소리를 질렀지. 아저씨 이름 뭐냐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게 퍽이나 귀엽다 싶었어. 다시 한 번 들리지도 않게 속삭였지. 백건이야. 세번째는 들려오지 않았어. 백건은 책상에 놓인 제 노트북이랑 책들을 바라보았어. 아, 나 과제해야되는데. 쟤 때문에.
애꿎은 가람만 탓했지. 가람은 소풍엘 가서도 내내 백건이랑 나눴던 대화를 생각했어. 아니, 대화라고 하는게 맞나. 노트 위에 끄적끄적 글씨나 끄적일 뿐인데. 하여튼 뭐, 이름은 모르지만 대충 나이는 알았으니까. 갑자기 아저씨 아니라고 반박하던 그
얼굴이 떠올랐지. 잘생기기는 엄청 잘생겼는데.. 연예인 했으면 아마 팬들이 어마어마했을거야. 가람이 가만히 벤치에 앉아 이것저것을 타러가자는 친구들의 손을 내쳤지. 나 속 안좋은거같애, 안탈래. 속이 안 좋기는 개뿔. 쌩쌩하기만 한데. 왠지 힘이 나질
않았어. 가람은 내내 턱을 괴고 앉아 그 생각을 했지. 아, 그 아저씨 보고싶다. 아득아득 아저씨 아니라고 우기던 웃긴 얼굴이 떠올랐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지. 놀이공원이고 뭐고 다 필요없으니 일찍 끝내주기만을 바랬어. 혹시 모르잖아. 잠깐
도서관엘 들렀는데 거기서 마주칠지. 게다가 도서관에 죽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가람은 마냥 두시가 되기를 기다렸어. 두시가 되면 보내준다고 약속했거든. 가람은 내내 시계만 보고 앉아있었어. 야, 속 많이 안좋냐? 친구들이 걱정해주는게 참 미안했지.
아픈것도 아니고 기분이 나쁜것도 아닌데 친구들 성의를 무시하는 기분도 들었지만.. 어쩌겠어, 놀 기분이 아닌걸. 가람은 괜찮아, 하고 말로만 하고는 계속해서 백건의 생각을 했어. 그 뿔테안경, 벗으면 더 잘생겼을텐데, 하느니, 쓸데없는 상상말이야.
두시가 되자마자 가람은 잽싸게 선생님께 인사만 하고 도서관으로 향했어. 마음이 급했던 덕인지 평소보다 더 이른 시간에 도착했지. 가람은 얌전히 자리에 앉아 백건이 오기를 기다렸어. 저 멀리서 백건이 보여 얼른 손을 흔들었지. 아저씨. 조그맣게 속삭인
소리를 들었는지, 백건이 저 멀리에서부터 인상을 찌푸렸지. 뭐야, 들었어요? 표정이 왜이래? 다 들었어, 임마. 어제 말했지, 아저씨 아니라고. 에에, 쓸데없이 귀만 밝아서... 욕도 못하겠네. 가람이 백건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웃어넘겼지.
백건은 다시 노트북을 켰어. 책은 전보다 두 권이 더 늘었지. 이거 다 들고 다니면 안 힘들어요? 가람이 물었어. 힘들지. 얼마나? 얼만지 말하면 아냐? 말은 해줄 수 있잖아요. 존나 힘들다. 존나. 백건이 유독 그 단어를 강조했어. 가람이 킥킥웃었지
나 어른들은 욕 안하는 줄 알았어요. 다 한다, 다 해. 아니, 내 앞에선 안하니까. 애가 나쁜 물 들을까봐 안한거지. 난 그런 배려 안해준다. 알아서 걸러 들어. 상관없어요, 맨날 학교에서 듣는걸. 가람이 팔을 베고 누웠어. 납작해진 뺨이 코를
파묻었지. 백건이 그걸보며 피식 웃었어. 왜 웃어요? 아니, 애구나 싶어서. 가람이 인상을 찌푸렸어. 나 애 아닌데. 고딩이잖아. 애지. 애. 애 아닌데. 애 아니면, 애기야? 애기라고 불러줬음 좋겠어? 가람이 손을 떨었지. 아, 진짜 재수없어!
가람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집에 가려는 체를 하자, 백건이 가람의 팔을 붙들었어, 미안, 안 그럴게. 앉아. 나랑 얘기하려고 온 거 아니야? 가람이 툴툴거리면서 자리에 앉았지. 짜증나게 진짜... 조그마한 소리가 다 들렸어. 백건이 가볍게 웃어
넘기며 가람을 달랬지. 일곱 살 먹은 어린 애 다루듯 말이야. 알았어,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애기 아니야, 됐지? 그러며 씩 웃는데, 가람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어. 쓸데없이 잘생겨서... 입속으로 그 말을 삼켰지. 입에 걸린 미소가 퍽이나
잘나보였어. 그 이후로 가람은 계속해서 백건을 만나기위해 도서관을 찾았지. 백건도 마찬가지였어. 집에서 한 시간이나 걸리는 도서관까지 가람이를 만나러 왔지. 물론 가람이는 그걸 몰랐지만. 백건은 마치 동생이 생긴 기분이었어. 위로 누나 하나가 있지만
항상 저를 애 취급하기에 바빴거든. 그런데 가람이랑 얘기를 하다보니, 정말 동생같은 거야. 몇 번이고 밥도 사주고, 커피도 사주거나 했지. 누나가 어디선가 얻어온 케이크도 가져다주고. 애는 애라고, 단 거에 환장을 했지. 그걸 보면서 참 귀엽다 싶었어
백건이 가람을 동생이라고 생각할 때쯤,, 가람은 한참 자라나는 그 나잇대 청소년답게 지룽노도의 시기를 겪었지. 내가 저 아저씨를 좋아하나, 에서부터 생각해서 청가람, 넌 미쳤어. 이걸로 끝났어. 하루종일 백건을 생각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지.
제가 미친건가 싶었지. 어디 좋아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 늙다리를..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게 진짜 좋아하는건가 싶은거야.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증상이랑 똑같았거든. 계속 생각나고 보고싶고, 목소리만 들어도 설레고... 결국 가람은 고백이라도
해보기로 결심했어. 차마 대놓고 할 자신은 없고, 어떻게든 말이라도 돌려볼 참이었지. 밥을 먹고 나와서 한참을 걷다가, 가람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어. 아저씨... 이건 내 친구 이야긴데요... 응, 백건은 차마 자기 애기일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애가, 한 일년 전부터 한 사람이랑 계속 만났는데, 뭐 할때도 보고싶고, 계속 생각나고, 목소리만 들어도 떨리고, 얼굴을 보고 있는데도 보고싶다는 생각을 한대요, 그럼 그게... 좋아하는 거에요? 목소리가 덜덜 떨렸지. 그런데 백건은 그거까진 알아채질
못했어. 글쎄, 말만 들어보면 맞는 것 같긴 한데.. 더 없어? 더요? 어.. 어제는 또 그 사람 꿈을 꿨대요. 그 전날에도 꿨고, 그 전전 날에도 꿨대요... 계속 꿈에 나와서... 음... 가람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어. 어떻게 말하겠어. 당신
이름을 부르면서 몇 번이나 했다고... 가람은 얼굴을 붉혔어. 그냥... 꿈에 나와서 손도 잡고... 그랬대요...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지. 백건은 웃으며 대답했어. 뭐야, 그 정도면 좋아하는 거 맞네. 가람의 얼굴이 붉어질대로 붉어졌지.
그래서 제가 막.. 고백하라고 했거든요... 어떻게? 어, 그러니까... 가람이 뜸을 들였어. 이런 걸 말하면 정말 빼도박도 못할 것 같은데, 너무 말이 하고싶은 거야. 결국 가람이 결심을 굳혔어. 그래, 한번 해보기라도 하자. 천천히 입을 열었지.
아주 오랫동안 봐온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많이 좋아해요.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것도 좋고, 걱정 돼 죽겠다는 듯이 나를 바라봐주는 것도 좋고, 그 목소리로 날 부르는 것도 좋아요. 나 어제도... 꿈을 꿨어요. 당신이 나와서, 내 이름을 부르면서,
그렇게 나를 끌어안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았어요. 난요, 나이도 어리고... 별로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그래도 너무, 너무 많이 좋아해서... 말이라도 해보고 싶었어요. 많이, 좋아해요. 가람이 입을 꾹 다물었지.
너무 많이 주절댄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됐지. 다 알아채는 거 아냐? 한참 그렇게 걱정을 하는데, 백건이 가만히 가람이의 이름을 불렀어. 다 망했어, 끝났어, 난 끝장이야. 그 생각이 유난스럽게, 백건이 호탕하게 웃었지. 괜찮은데? 너 이런쪽으로 소질
있다. 그 정도면 괜찮은거 같은데. 그래서 친구가 말 했대? 어떻게 됐는데? 너무 야속했어. 자기 얘기인 것도 모르나? 그게 너무 서운하고 섭섭해서, 가람이 그만 엉엉 울어버렸어. 야, 왜그래? 걔 잘 안됐대? 눈치 없이 물어오는 꼴이 참 짜증이
나는데 그래도 싫어지지가 않는게 더 기분이 나빴어. 가람은 엉엉 울며 남자의 어깨를 밀어냈어. 왜 몰라요, 왜! 투정부리듯, 그렇게 엉엉 울었지. 뭐, 뭔데.. 백건이 말을 더듬었어.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어.결국 가람이 소리를 질렀지.
나 지금 고백하잖아요! 내가 지금, 아저씨를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는데, 왜, 몰라요...! 끅끅거리는 울음이 새어나왔지. 백건의 얼굴이 새하얘졌어. 내가 존나 미쳤지. 내가 왜 아저씨같은 걸 좋아해서! 확 백건을 밀쳐내며 가람이 그대로 도망쳐버렸어.
백건은 가만히 멀어지는 가람의 뒤에대고 이름만 불렀지. 가람은 집으로 돌아가서 아주 서럽게 울어댔어. 엄마가 문을 두드리며 가람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도 못했지. 쪽팔리게 어떻게 말해. 남자한테 고백했다가 차였다고. 죽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는데,
무서워서 그러지도 못하는게 참 멍청하고 서러웠어. 백건은 오도카니 그자리에 서 있다 계속해서 가람의 이름을 불렀지. 머리가 새하얘지고,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 같았어. 날 좋아한다고? 자기가? 왜? 이해할 수가 없었지. 결국 백건은 하나 결심을
했어. 내일, 아무렇지도 않게, 어른답게 맞아주자고. 가람이가 좋아하던 케이크랑, 음료수랑 바리바리 잔뜩 싸들고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로 기다렸지.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가람이가 오지 않았어.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지. 백건은, 모든게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어. 설마, 진짜였나? 나 놀리는 게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들자 정말 아무생각도 들지 않았지. 전화라도 하고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가람의 번호 하나도 알지 못했어. 제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지. 백건은 멍하니 자리에 앉아 시간을
죽이기만 했어. 가람을 기다리는 건지도, 아니면 그저 앉아있는 건지도 분간을 할 수가 없었어. 본인조차 그게 혼란스러웠거든. 만약 가람이가 나타나면?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하지? 복잡하고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지도 못하고, 결국 백건도 그 도서관에 발길을
끊었어. 그렇게 반 년이 지났지. 가람은 빼꼼 도서관 안쪽으로 고개를 내밀었어. 도서관은 역시 아무도 없더라. 그걸 알면서도 살금살금, 발꿈치를 들고 ㄷ소리도 나지 않게 조용히 들어가는데, 카운터에 앉은 사서 하나가 가람이를 불러세웠어. 히익, 소름이
돋아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지. 학생, 혹시 이름이 청가람이야? 사서가 그렇게 물어오는데, 가람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어. 어떻게 아세요? 라고 물으려고 했는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어. 사서가 가람의 손에 곱게 접은 쪽지 하나를 쥐어줬지.
어유, 봄인가, 어떤 잘생긴 청년 하나가 혹시 학생이 여기 다시 오면 이거 전해주라고 주고 가더라구, 꼬박꼬박 오더니, 요즘 왜 안왔어? 손이 덜덜 떨렸어. 설마, 설마 그럴리가. 뭘 바라고 날 찾은거야. 가람은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어
가만히 곱게 접힌 쪽지를 펼쳤지. 그 종이엔 그 언젠가 보았던 대충 휘갈겨쓴 글씨로 번호 하나가 적혀있었어. 그 어떤 말도 없었지. 딱 번호 하나였어. 가람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키패드를 눌렀어. 통화버튼을 누르려는데, 문득 손이 멈췄지.
그런데, 전화해서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이미 상처를 받을대로 받았고, 가람인 아직 마음의 정리도 하지 못했어. 다시 만난다고 해도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이 아예 불타 없어져버리면 그랬지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거든. 가람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어. 웬걸. 손에서 연결음이 들렸어. 저도 모르게 눌러버렸나봐. 얼른 전화를 끊으려고 손을 움직이는데, 전파 너머에서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어. 여보세요? 가람인 할 말을 잃었지. 말도 나오지 않았어. 여보세요? 혹시 청가람이야? 뚝. 전화를
끊었어.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가람은 얼른 도망쳤지. 그 번호를 스팸으로 등록해놓고, 하루종일 그 번호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어. 오랫동안 참 많이 듣고싶은 목소리였어. 하나도 변한 게 없었지. 가람은 가만히 스팸번호를 해제했어. 새벽 두시였어.
만약 받으면 잘못 눌렀다고 둘러대지 뭐, 안 받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가람이 피식 웃으며 통화버튼을 눌렀어.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안 받을 거라고 확신했지. 연결이 다 끊겨갈 쯤이었나, 연결이 됐어. ...청가람. 깊게 잠긴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렀지. 가람은 그만 숨이 막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어. 너, 청가람이지. 백건이 확신하듯 말했지. 가람은 다시 전화를 끊었어. 역시, 아직 전화를 걸 자신이 없었어. 결국 가람은 다시 그 번호를 스팸번호로 등록했지. 그 번호로 전화가
오는 일은 없었어. 대신, 가람이 끈질기게 문자를 보냈지. 처음엔 두어 문장이었어. 안녕, 아저씨. 그러던 것이, 며치이 지나고, 몇 주가 지나고, 몇 달이 지나자,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이어졌지. 아저씨 그 촌스러운 보라색보다 까만색이 어울릴걸요.
친구들이랑 놀러왔어요. 오랜만에 신나게 놀았어요, 걱정 말아요. 본인이 왜 그러는지 이해도 하지 못했어. 그럼에도 꿋꿋하게 메시지를 보냈지. 이따금 사진을 첨부했어. 아저씨한테 어울리는 안경, 내가 본 풍경, 이것저것, 기타등등. 그럼에도 꿋꿋하게
제 얼굴은 보내지 않았지. 그렇게 한 일년이 지난 때였나. 가람이 대학생이 되던 해였어. 백건이 그랬듯, 교양 책이랑, 노트북이 든 가방을 멘 어깨가 뻐근했지. 아저씨, 이거 무겁지 않아요? 그 어린 날의 제가 떠오르고, 무겁지, 존나 무거워. 그렇게
말하던 백건의 얼굴이 떠올라서 피식 웃음을 흘렸어. 살짝 고개를 돌리는데, 육교 아래로 머리가 하얀 살마 하나가 지나가는게 보였어. 대학생이 되면서 렌즈를 끼기 시작했는데, 마침 렌즈도 두고 온 터라 흐릿하게만 보였지. 가람이 눈을 가늘게 뜨며 픽
웃어버렸어. 그럴리가 없지. 가람이 보이지도 않는 눈을 가늘게 뜨며 육교 아래의 그 남자를 찍고는, 백건에게 메시지를 보냈어. 나 아저씨 닮은 사람을 봤어요. 그리곤 낄낄거렸지. 그런데 곧, 어디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 가람은 멈칫 걸음을
멈췄지. 청가람! 육교 아래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 천천히 난간을 붙들었지. 아까 그 머리가 하얀 남자가 떠나지도 않고 제자리에 있었어. 왈칵 눈물이 쏟아졌지. 가람은 휴대전화를 꺼내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어. 육교 밑에서 벨소리가
들렸어. 제가 좋아하다고 노래노래를 부르던 팝송이었지. 핑 눈물이 도는 것 같았어. 뚝.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지. 청가람. 전파 너머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 아니, 육성이었던가. 하여튼 가람이 픽 웃음을 흘렸지. 청가람. 또다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어. 안녕, 아저씨. 꾸역꾸역. 입술사이로 울음이 비집고나왔지. 가람이 찬찬히 손을 흔들었어. 선명하진 않았지만, 아마 백건도 손을 흔드는 것 같았지.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반가워요. 그리움을
꾹꾹 눌러담은 말들이 봇물이 터지듯 터져나왔어. 내내 제 이름을 부르던 백건이 조심스레 입을 뗐어. 오랜만이야, 가람아. 응, 오랜만이에요. 안녕, 아저씨. 천천히 가람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어. 보이진 않았지만, 세상이 참 아름답게 보였지.
안녕, 아저씨. 수도 없이 반복한 말을 입속으로 삼키며, 가람이 소매로 눈가를 꾹 눌러닦았어. 참 오랜만이라, 어떤 말부터 해야 할 지도 몰랐는데, 그게 다 소용이 없는 것 같았어.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가람의 첫사랑이 다시 시작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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