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랬더라, 열여덟은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가람이도 딱 그런 때가 있었어. 후두둑 떨어진 꽃잎들이 길목마다 떨어져있어서 그걸 짓이기는 게 퍽이나 재미있었지.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어. 중학교 2학년 때였던가. 친구, 라기엔 뭣 한 놈이 가르친 거였지.
하여튼 그 친구랑 헤어지게 난 뒤에도 가람인 쉽게 입에서 담배를 떼지 못했어. 작년까지 가람이의 소매를 붙들며 제발 그러지 말라고 엄마가 울었고, 엄마가 우는 걸 보면 방으로 쳐들어와 곧장 멱살을 잡던 아버지도 이제는 완전히 포기한 모양이었어.
세 개피째를 연달아 피는데 세개피째가 돗대였나봐. 담배갑이 텅 비어서 담배냄새만 났지. 아, 돈 없는데. 가람이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골목을 나섰어. 편의점 옆에서 담배를 피는 애들이 있었거든. 야, 나 한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자연스러웠어. 애들은 멍해서 대답도 못했고, 가람이가 병신, 하고 작게 중얼거리더니 방금 불을 붙인 애의 입에 있던 걸 가져가 물었어. 고맙다. 툭툭. 어깨를 두드리며 그렇게 멀어졌지. 사실 가람이가 그렇게 남의 입에 닿았던 걸 피는 건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어. 자주 그랬거든. 하여튼 가람이는 반대편 골목으로 들어갔어. 쭈그리고 앉아서 검지와 엄지로 간당간당하게 걸린 담배가 가만히 타들어갔어. 옛날엔 이 냄새조차 싫었어. 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걸 보니...중독이라도 된 모양이지
하여튼 가람인 그 골목에서 지나다니는 제 또래 애들의 담배나 뺏어 피고 그랬어. 없어 보이는건 맞는데, 용돈이 떨어진지 오래였거든. 돈이 필요할 땐 거기에 죽치고 앉아 해가 떨어지길 기다렸어. 술 취한 아저씨들의 지갑에서 돈이나 빼돌렸지. 가끔 가람이를
붙들며 무어라고 아득아득 소릴 지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가람이 입을 맞추며 혀를 얽었지. 역겨운 담배냄새가 났어. 입을 떼곤 곧장 쏴붙였어. 지금 나한테 키스했어요? 미친 거 아냐? 돈 주면 신고 안할게요, 이러면서 돈이나 빼갔어.
그 탓에 가람이의 머릿속에서 키스니 뭐니 하는 것들은 점점 멀어지기만 했어. 돈이 필요할 때만 두어 번을 해주면 됐어. 수입도 좋은 편이었어. 많으면 한번에 20만원까지 뜯어냈거든. 하여튼 썩 선량한 학창시절은 아니었어. 학교에도 잘 나가지도 않았고.
하여튼 그런 일이 연속이었지. 그날도 별반 다를 게 없었어. 발치에 쌓인 당배꽁초를 보며 이러다 죽으면 웃기겠지 하는 생각을 할 때였어. 잘빠진 흰색 운동화가 보였어. 야, 불 있냐. 재수없는 어투.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훽 던져줬어. 금방 땡큐,
하는 목소리가 들렸지. 그런데 사람 그림자는 없어지지를 않았어. 오히려 가람이랑 똑같이 주저앉아 눈을 맞췄지. 넌 뭐야. 짜증스런 목소리로 물었어. 상대는 별로 신경도 안쓰는 것 같았지. 너 고운고지? 나도 거기 다니는데. 살갑게 말을 거는 게 참 이상했어
난 백건이야. 가슴에 달린 이름표가 보였어. 백건. 아, 예. 그러시구나. 가람이 대강 넘기며 대답했어. 너 친구 없지? 단도직입적인 물음이었어. 가람이 인상을 찡그렸어. 나랑 친구할래? 미친놈. 가람이 쏘아붙이며 자리에서 일어섰어.
그 다음날도 백건이 다가왔어. 그 다음날도. 그 다 다음 날도. 매일매일 옆으로 다가와 불이나 달라 그러고 한참이나 마주앉아서 담배나 태우다 갔지. 그렇게 한 삼주가 지났던가. 백건이 물었어. 넌 학교안가? 오전 열한시였거든. 가람이가 가만히 고갤 돌렸어
안 가는데 왜. 맨날 담임이 너 찾는대. 왜? 몰라. 걱정되나부지. 백건이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어. 가람이는 거기서 살짝 찡했어. 가족들도 저한테 손을 놔서, 아무도 걱정해주지 않았거든. 솔직히 말하자면 감동했어. 그러나 곧 다시 맘을 잡았지.
지랄, 그럴 리가 있냐. 그러며 한참을 킥킥댔어. 고작 골목에 앉아서 맞담배나 피고 쓸데없는 이야기나 늘어놓다 해가 질쯤에 헤어졌어.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매번 보던 터라 눈에 익었나봐. 열한시 쯔음이 되니까 가람이가 그걸 느꼈어. 제가 백건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언제오나, 하면서, 오매불망. 허탈한 웃음이 샜어. 그리고 저 반대편 큰 길에서 백건의 얼굴이 보이는데, 웬 여자애랑 키스를 하고 있는 거야. 그 큰 어깨에 폭 안겨서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백건을 올려다보면서 수도 없이
입을 맞추는 걸 보았지. 그러다 백건이랑 눈이 마주쳤어. 가람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비벼 껐어. 그리곤 도망쳤지. 왜인지도 몰랐어. 뒤에서 백건이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돌아본 데엔 아무도 없었어.
비참해서 죽어버리고 싶었어. 그래도 계속 도망쳤지. 문득문득 걸음을 멈췄어. 백건이 쫓아와주기를 바라기라도 한 건지, 참 우스운 일이었지. 내내 도망쳤던 것 같아. 갈 데도 없는데 계속해서 걸었어. 멈추지 않았지. 두어 시간이나 동네를 돌다가, 다시
그 골목으로 돌아왔어. 어디에 있어야 백건이 보이지 않을지를 몰랐거든. 멍청한 일이었어. 근처에 초등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어. 저도 딱 저런 때가 있었는데. 아아니, 가람은 얼른 고개를 저었어. 몸을 웅크리고 앉았지. 눈물이 났어.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고 한참이나 울었던 것 같아. 개새끼, 씨발새끼, 별의 별 욕이 다 튀어나왔지. 따지고 보면 백건이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저 여자 친구랑 키스를 했을 뿐이고, 그 뿐이야. 단 한 번도 저와 백건이 친구라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어.
그런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고 기분이 더러운지. 서로 번호도 모르니 발신자제한 번호로 전화를 걸어 실컷 욕도 못했어. 그냥 툭툭 입속으로 뱉어내기만 할 뿐이었지. 눈앞에 짙은 그림자가 졌어.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고,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지.
소매로 계속 눈가를 훔쳤어. 눈이 새빨개졌을 거야. 얼굴도 엉망이고, 그런데도 가람인 꿋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어. 혹시 요 근처를 돌아다니다 백건을 마주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부러 초등학교 쪽으로 길을 돌아갔어. 느릿하게 걸었지. 평소랑 다르게
초등학교 앞이었어. 땅거미가 지는 운동장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누가 뒤에서 손목을 붙드는 거야. 백건이었어. 땀에 절은 얼굴로 헉헉거리며 물었지. 너, 어디 있었어. 저를 걱정해주는 말이었을 거야, 아마. 그런데 왜 그런 못돼쳐먹은 말이 튀어나오는지.
무슨 상관이야, 신경 꺼. 가서 니 여자친구랑 키스라도 하든가. 제 모습이 그저 찌질해보이기만 했어. 사실 백건이랑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잖아. 그저 몇 주 동안 얼굴 맞대고 담배나 피던 사인데, 너무 이상한거야. 그래서 더 그런 말을 쉽게 튀어나왔는지몰라
그런데 이상하게 백건의 표정이 일그러졌지. 너, 걔가 내 여친으로 보여? 그럼, 키스는 왜했는데. 아, 닥쳐, 청가람.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제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는데, 입술이 멈추지를 않았어. 계속해서 쏟아내기만 했지. 그럼 왜 키스했는데. 유치한
말이었어. 사실 자기랑 아무 관련도 없는 일이잖아. 가람은 대답도 못하고 멀거니 눈만 맞추고 있는 백건을 쏘아붙였지. 봐, 대답 못하잖아. 지랄하고 있네. 걔가 니 여친으로 보이냐고? 제발 말하지 마. 머릿속에서 제가 그렇게 애원하는데, 가람의 입은
멈추는 법을 몰랐어. 키스했잖아. 그럼 여친이지. 씨발. 가람이 짧게 덧붙였어. 백건의 표정이 경악인지 어이없음인지 뭔지로 물들었지. 가람은 그 말을 하자마자 곧장 후회했고,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어. 키스했잖아, 래. 속으로도 어이가 없었어.
더 가관인 건 백건의 표정이었지. 요상함으로 가득하더니 가람의 손목을 쥐고 진지한 얼굴로 물었어. 너, 그거 진심이야? 가람이가 대답도 하기 전에, 백건이 가람을 끌고 초등학교 안으로 들어갔어. 초등학교엔 놀이터가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거의
사용도 하지 않았거든. 백건이 걸음을 멈춘 곳은 거기였어. 뭐야, 뭔데, 그렇게 묻기도 전에 백건이 가람의 어깨를 쥐고 곧장 입을 맞춰왔지. 정신이 아득해지고 아무 생각도 안 들었어. 이 미친새끼가 뭐 하는 거야, 가람이 얼른 입을 떼며 백건을 밀쳤어
백건이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며 중얼거렸지. 잘 봐, 아까 그년이 나한테 한 게 이건데, 이건 키스가 아니야. 씨발. 그년이 날 덮친거지. 불쾌함이 가득 물들었어. 그리고, 다시 백건이 가람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었어. 얼굴이 바짝 다가왔지.
입 벌려. 낮은 목소리가 귀에 울렸어. 어버버거리는 가람의 입술이 벌어지자, 백건이 곧장 혀를 얽었지. 백건의 가람의 뒤통수를 잡고 도망도 치지 못하게 막았어. 생각보다 입술이 금방 떨어졌어. 백건이 씩 웃었지.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이게, 키스야.
가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어. 저 미친새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도 할 수 없을 정도였고, 분명히 기분이 더러웠어야하는데 왠지 나쁘진 않은 거야. 그런데 최대한 싫은 척을 했어. 기분이 좋았다는 걸 들키는 게 자존심이 상했거든.
지랄하지마! 미친 것도 아니고... 가람이 소매로 입술을 쓱쓱 닦았어. 백건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지. 뭐야, 별로야? 가람인 말도 하지 못했어. 백건이 다시 가람이의 어깨를 잡았지. 너 보나마나 여자친구도 못 사겨봤지? 그 말에 가람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어. 아니거든!! 백건은 당연히 믿지 않았어. 얼굴이 새빨개져선 대답도 제대로 못하는데, 어떻게 못 알아볼 수 있겠어. 아냐, 너 분명 여자친구 하나도 못 사겨봤을걸. 그렇다면 이렇게 키스도 못할 리가 없지. 백건이 놀리듯 중얼거리자 얼굴이
새빨개진 가람이 덥썩 백건의 멱살을 잡아끌었어 확 입술이 닿았지. 어떻게 해보려는 듯, 가람이가 백건의 입술안쪽을 깨물었어. 백건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고, 가람은 입술을 부비듯 문대왔지. 그런데 그게 끝이었어. 그저 그것밖에 할 줄을 몰랐거든.
백건이 입술을 떼며 피식 웃었어. 더럽게 못하네. 아니거든! 가람이 다시 반박하려하자, 백건이 입을 맞추었어. 입 벌려. 끈적하게 가람의 치아 갯수를 세기라도 하듯 혀를 굴렸어. 너무 밀어붙이는 식이라 뭔갈 느낄 수도 없었어. 파, 하고 가람이 숨을
뱉으며 비웃었어. 뭐야, 너도 썩... 말을 줄였지. 백건의 이마에 핏대가 선 게 보였어. 으득 이를 가는 소리도 들렸지. 킥킥거리는 웃음이 이어지자 백건이 손을 뻗어 가람의 뒤통수를 쥐었어. 귓가에 바짝 뺨을 붙이고 낮게 속삭였지.
이리와, 내가 천국을 보여주지. 그리고 씨익. 화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어. 아득한 기분이었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는데, 꽤나 아찔한 기분이었던 것 같아. 그런 기분은 난생 처음이었어. 백건은 딱히 다른 데엔 손도 대지 않았지. 그저, 입을
맞췄을 뿐이었어. 진하게 얽혀왔고 그 이상은 없었지. 그런데 입술을 떼던 순간에 다리에 힘이 풀렸어. 입속엔 여전히 백건의 혀가 훑고 지나다니는 것 같았지. 소리를 지를 뻔했어. 가람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어. 백건이 허릴 굽혀 가람이와 눈을
맞췄지. 장난스러운 얼굴이었어. 넋을 놓은 가람의 얼굴을 보며 백건이 조용히 속삭였지. 앞으로 깝치지마, 또 키스해버릴 거니까. 가람인 아무 말도 못했어. 백건은 거기에 가람일 두고 갔지. 고맙게도 그네 위에 가람을 올려놓고 갔어. 끽끽거리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가람인 제 입술을 만져댔어. 아직도 그 속에 백건의 혀가 기어 다니는 기분이 들었어. 입 벌려. 이게 키스야. 그 말이 계속해서 머리를 맴돌았지. 가람은 끝끝내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그 날부터 가람은 백건의 입술만 쳐다봤어. 그으래, 저 입술이란 말이지.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어. 그 얼굴이 지독하게 잘생겼지. 어떻게 하면 저렇게 잘생길 수가 있지. 삐죽 입술이 나왔지. 곧 백건과 키스하던 그 날 저녁이 떠올랐고, 얼굴이 붉어졌지.
내내 휴대폰을 만지던 백건이 힐긋 가람에게 시선을 주었지. 뭐야 뭘 봐? 너 핸드폰 그만하지 그래? 왜, 질투나? 가람이 인상을 썼어. 백건은 내내 검색을 하던 손을 멈추었어. 섹시하게 보이는 각도. 얼른 그걸 지워버렸지. 가람의 시선이 제 입술에
닿은 게 보였어. 얼굴도 새빨개진걸 보니 어젯밤 키스라도 생각한 모양이지? 짓궂은 말에 가람이 고갤 저었어. 그런 거 아니면 그만 쳐다봐, 닳아. 가람의 말에 가람이 내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뱉었지. 진짜... 재수 없는 새끼. 물론 악의라고는 한 톨도
담기지 않은 말이었어. 백건도 그걸 알았지. 백건이 손가락을 까딱였어. 가람이 다가왔고, 네가 그렇게 하고싶어하니까, 해주는 거야. 인심이라도 쓴다는 듯 백건이 먼저 입을 맞춰왔어. 좋아? 입술을 떼며 씩 웃었지. 미친새끼. 그딴 걸 왜 물어?
가람이 딴죽을 걸며 백건의 어깨를 밀어냈어. 그래서, 싫어? 백건이 묻자, 가람이 시선을 돌렸어. 존나, 무드 없는 새끼. 그딴 거나 물어보고... 가람이 백건의 멱살을 잡고 곧바로 입을 맞췄어. 안 싫어, 좋아. 좋아 죽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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