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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의 낙찌님(@dungcha_zzi)의 사방신 썰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낙찌님 감사합니다.

둥굴레차!

백건X청가람

돌지 않는 계절의 끝

18.11.07






  봄은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짓이겨 으스러진 꽃잎들을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다. 몇 달 내 세상 온 구석구석을 덮어내린 겨울의 눈을 녹이는 건 은찬의 몫이 되었다. 녹아 흐르는 눈송이가 흘러 개울을 이루고, 바다가 되어 영영 사라지는 걸, 은찬은 아주 오래토록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세 달이 네 달이 되고, 네 달이 반 년이 될 동안 은찬은 항상 불안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몇 해가 지났음에도 가람이 내내 같은 자리에 잠들어있는 걸 마주했을 땐 울컥 눈물이 났다. 이전에는 다른 사신의 온실에 머무는 시간이 기껏해야 이틀을 채 넘지 못했다면, 지금은 그 시간이 마냥 길어져 몇 주의 시간을 머무른다해도 여름이 채 끝나지 않았다. 은찬은 하염없이 걷고, 이야기했다. 잠든 가람의 머리칼을 쓸어올리고, 백건의 얼굴을 멋대로 당기고, 현우의 소맷자락을 저 좋을 대로 묶어내며, 내내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은찬은 지상엘 내려갔다. 지상은 아주 많은 것이 바뀌어있었다. 중앙엔 황순이 할머니를 대신해 새로운 관리인이 생겼고, 사신 후계자는 훌쩍 커 중앙에서 비급서를 뜯어보는 중이었다. 온갖 곳을 돌고, 흔적을 밟고나면, 항상 그랬듯이 은찬은 여즉 유나비가 산다던 그 동네를 돌았다. 여름 밤의 후덥지근한 공기를, 은찬은 싫어하지 않았다. 강둑 어드메에 걸터앉아, 은찬은 눈을 감았다.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커지며, 으레 그랬듯 사람들의 말소리가 작아지는 순간이었다.


  사실, 은찬은 유나비를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해주지 못했지만, 몇 번은 뒷모습을 보았고, 그 때마다 유나비의 이름 석 자가 목구멍을 채웠으나 차마 부르지는 못했다. 인사를 나눈 것은, 그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된 해였다. 머리를 하나로 내려 땋은 것이 퍽 예뻐,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는 것만은 비밀이었다. 그 때에도 은찬은 강둑에서 유나비를 만났다. 장이라도 봐온 듯 한아름 품에 끌어안은 짐을 나눠들어주며, 은찬은 예전과 같이 그렇게 애프게 웃었다. 오랜만이야. 그렇게나 그리워하고 바라던 목소리여서 그랬나. 은찬은 목이 매었다. 그동안 무얼 하고 어디서 지냈느냐는 나비의 물음에, 은찬은 금방 대답을 못하고 그저 여행이 길어졌다고만 얼버무렸다. 말하기 싫구나. 농담처럼 건네진 말에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그럼에도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좀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날을 걸었다고, 한 순간도 너를 잊지 않았다는 말만은 나오지가 않았으나, 은찬은 겨우 웃으면서 이야기를 맺어냈다. 유나비에 대한 것은 부러 물어보지 않았다. 저가 생각하지 않으려던 사실들을 그 입으로 직접 들어버리면, 돌이킬 수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둘은 노을이 지고, 하늘에 별이 박히고, 샛노란 달이 머리 꼭대기에 뜰 때까지 이야기했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미약한 기약과, 많이 보고 싶을 거라는 느즈막한 진심과, 너를 아주 많이 그리고 좋아했다는 때늦은 고백은 한 데 엉켜, 그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안녕이 되었다.


  데려다주지 않아도 괜찮겠어? 하고 묻는 은찬에게 나비는 괜찮다고 웃어주었다. 짐이 가벼워서 혼자 들고 갈 수 있다고, 너는 여전히 상냥하구나, 하고 웃어버리는 나비의 말에, 은찬은 집 앞까지 바래다주지도 못하고 그저 길어진 그림자마저 어둠에 묻혀 마냥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너를 많이 좋아했었다는, 언제까지고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말은 오늘도 그 뒷모습에 속살인 것이 마지막으로, 영 끝나지 않으리라 생각되던 여름은 어찌어찌 끝을 맺었다. 은찬은 매번 잠들던 침대를 내버려두고, 온실 제일 한 구석에서 이불자락을 끌었다. 품안에 끌어안은 베개에 깊게 얼굴을 묻고, 숨을 참는다. 숨소리가 잦아들었고, 온실 한 데에 있는 연못에서 물고기가 튀어오르는 소리만이 나직하게 울렸다.






  그 해의 가을은 아주 잠깐이었을 거였다. 가을이 찾아왔는지, 사라졌는지도 모를만큼. 백건은 서둘러 제 할 일을 해냈다. 여느 때처럼 잠에서 깨어 제일 처음 찾아간 곳이 가람의 온실이 아니라, 백건의 뒤를 쫓아다니던 신령 또한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거였다. 하늘은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단풍이 물드는 시간이 아쉽다 싶을 정도로, 느즈막하던 가을은 그렇게 저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봄과 가을은 그 어느 쪽으로도 서로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아서 그랬나. 의외로 봄이 사라졌다는 사실 자체는 썩 아쉽지 않았다. 백건은 가만, 가람의 옆에 몸을 뉘였다. 봄이 죽어버렸기때문에, 가람은 몇 해가 지나도 여즉 그 자리 그대로에 있어서, 찾아내기가 쉬웠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다행이었다. 올해도, 사라지지 않았구나, 하고. 백건은 가만 가람의 어깨를 당겼다. 



  "넌 내가 진짜 원망스러웠겠다."



  툭툭 뱉어내는 말들에 이젠 미련만 남았다. 처음엔 마냥 격앙되던 감정도 이젠 잠잠해졌다. 소리에 고저가 없었다. 백건은 가람을 당긴 손에 더 힘을 주었다. 품 안에 약간 모자라게 차는 어깨를 끌어안은 채였다.


  어쩌면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 알고 있었으나 어떻게든 모르는 체를 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거였다. 애시당초 백건에게 가을이란, 가람에게로 향하는 시간,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그 시간은 언제나 찰나로 느껴지고는 했기 때문에, 제가 깨어있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보다, 가람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이 더 아쉬웠다. 



  "실감이 안 나, 아직도."



  일이 이따위로 돌아갈 줄 누가 알았겠어,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는데. 그러며 백건은 질근 입술을 뜯었다. 이전이면 분해죽겠다는 듯 소리를 지르고 온실의 이것저것을 다 부수어 놓았지만, 이제는 체념했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변하지 않을 걸 알았으니, 더 달라지리라고는 기대조차 않았다. 기대를 하는 일에는 아주 많은 감정이 들어서, 종래엔 바닥을 득득 긁어대고는 그걸로도 모자라 한참이나 울음을 토해야 했으니까. 백건은 더 기대를 하지 않으려, 아주 오랜 시간 애를 썼다.



  "...듣고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니, 사실 들리는지도 알 수 없다. 이따금 은찬이 남기고 간 이야기는 몇 번 전해들었으나, 전해들은게 끝이었던 거다. 신령들은 언제나 주작이 남기고 간 말이다, 하고 말아버렸으니, 백건의 귓가에 속삭인 걸 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그런 적이 없었던 것인지, 백건은 이제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지상에 있는 것들이, ... 다 봄을 잊어버린다고 해도."



  백건은 입을 다물었다. 울음이 나올 것 같았는지, 아니면 가람에게 미안해 죽을 것 같은 감정이었는지, 저 자신이 끔찍해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던지, 백건은 쉬이 말을 잇지를 못했다. 있잖아, 청룡, 지상의 것들이 다 너를 잊는다고 해도,



  "... 나는 널 기억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백건이 쉬이 말을 잇지 못했던 건 이때문이었다. 저는 언제까지고 기억할 것이다. 아무것도 잊지 못할 거다. 그토록 사랑하고, 제 것이길 열망하던 그 알량한 정복욕을 평생 끌어안고 가람을 그리며 살 것이다. 나를 바라보던 네 눈이 얼마나 예뻤는지, 내 이름을 불러주는 네 목소리가 얼마나 기꺼웠는지. 이따금 당겨안아주던 품이, 지금과는 다르게 얼마나 따뜻했던지. 그런데. 가람은 저를 기억해주지 않을 것 같은 거였다. 백건은 입을 다물었다. 눈을 감았다.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그 언젠가 사라져버려 그 끄트머리까지 쥐지 못하게 된대도, 봄만은 영원히 어드메에 남아 매 해 그리게 될 것이다. 



  "가을의 나를 잊으면 안 돼, 청룡, 알겠지."



  봄의 너와, 가을의 나를, 영원히 잊으면 안 돼. 숨이 닿을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기껍게 입을 맞추며 사랑한다 끊임없이 속삭이기에도 모자랄 시간이었다. 이름이 다 닳아빠질 때까지 씹고, 입 안에 굴리며 네 숨에 질식해 죽어도 좋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이고픈, 마지막 가을이었다.


  봄이 사라진 자리를 여름이 채우고, 사라진 가을의 곳곳을, 틈 하나 남기지 않으려는 듯. 지상엔 아주 오랜 시간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그럴수밖에 없겠지만.. 우릴 너무 원망하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


  좀 이기적이지. 그러며, 웃었다고 했나. 신령에게 전해들은 은찬의 말은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것마냥 생생했다. 가람은, 꾹 입술을 깨물었다. 지상에 흐드러지게 핀 꽃이 거의 져버릴 즘이었다.


  원망, 이라. 원망스럽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가람은 곰곰이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살살 고개를 저었다. 그래,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그 원망은 항상 제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며 제발 자기를 도와달라고 우는 소리를 하던 현우나, 네가 있어 다행이라고, 우리가 다 같이 하늘에 오르면 좋겠다, 하고 속없이 씩 웃어버리던 은찬이나, 네가 여기에 남아 무얼 할 수 있을 것 같느냐 몰아붙이던 백건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백건은 조금 원망했다만, 그정도야 코웃음을 치며 넘어갈 수 있었다. 가람은 언제나 주은찬의 호의에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현우는 보고 있자니 철없는 어린 애를 보는 것 같아 마냥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밥 해 주는게 그렇게 좋아, 돼지들아? 다음 날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가람의 옷자락을 붙들고, 내일은 이게 먹고싶네, 저게 먹고싶네, 하는 은찬과 현우에게 가람이 그렇게 물었던 날이 있었다. 둘은 그에 대고 네가 해주는 밥이 제일 맛있다고, 좋다고 그렇게 웃어버리고, 막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백건을 향해 건아, 너도 그렇지? 하고 능청을 떨었다. 백건은, 그 때 뭐라고 했더라. 항상 멍청한 소리나 하고, 저를 몰아버리고, 퉁명스러운 얼굴로 카드를 건네고, 하루가 멀다하고 대련을 하자고 옷소매를 걷어붙이던  백건은, ... 가람은 입을 다물었다.


  여즉 가람은 인간의 감정을 제대로 정의내리지 못했다. 호의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으나 그 호의가 어떤 의도로 베풀어진것인지는 관심이 없었다. 잘못이 왜 잘못인지 알아채기까지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간의 감정이란 제대로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이 많았다. 사전적인 의미는 대강 이해하고 있었으나, 가족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라는 감정만큼은 끝까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애정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인간은 그에 그렇게 목을 매고, 사랑이라는 말에 그렇게 기꺼워하는지. 언젠가 가람은 주은찬의 옷자락을 붙들고 물었다. 주은찬, 사랑이라는게 뭐야? 은찬은 가람과 잠깐 눈을 맞추는가 싶더니, 시선이 잔뜩 굴렀다. 은찬은 사랑이라는건, 하고 무어라 설명을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고, 운을 떼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더니 결국엔, 설명하기 어렵다고 애써 웃어버렸더랬다. 인간과 그리 가깝게 지내던 은찬조차 알지 못한다는 그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람은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람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 마음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어, 어디에 불을 지폈는지조차. 






  가람은 걸음을 옮겼다. 정처없이 한참을 돌다, 지상엔 죽어도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정신없이 걷다보니 자연스레 걸음이 멎은 곳이었을 뿐이었다. 백호는 아직 잠이 들어 계십니다, 하던 신령의 말이, 유난히 신경을 긁었을 뿐이었다. 가람은 온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마다 낙엽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봄이 오고, 잠에서 깨어날 적마다, 제 손끝에, 옷깃 사이에, 짓이겨진 꽃잎 새로 보이던 노란 것들은 백건의 흔적이었으리라. 언젠가 맡은 네 냄새가 은근하게 났다. 가람은 침대 바로 앞에 서, 백건이 잠든 모양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나질 않았다. 가슴이 오르내리지도 않고, 이갈이를 하는 소리도 한 번이 없었다. 너는 꿈을 꿀까. 꿈을 꾼다기엔 지나치게 조용했고, 꿈조차 꾸지 않고 잠들기엔 너무 길었다. 그 생각을 하는 가람도, 사실 하늘에 올라 봄을 기다리는 동안, 꿈을 꿔 본 적이 없었다. 


  가람은 흔하게 악몽을 꾸었다. 그 꿈은 유달리 특별한 것도 없이,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고는 했다. 꿈 속에서의 가람은 언제나 엉엉 우는 채였다. 답잖게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크게 소리를 내어 울었다. 자꾸만 뱉어내는 말은 새나오는 울음에 섞여 다 문드러진 채고, 그 말은 죄 어린 자신을 향한 거였다. 아빠가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건, 다 내 잘못이야. 그 말이 똑똑히 들리면 잠에서 깨었다. 세상이 핑 도는 것 마냥 어지럽고, 누군가 제 목을 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숨조차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제 옷깃만을 틀어쥐고 진정을 찾을 때였다. 어깨를 틀어쥔 손이 퍽 우악스러웠기 때문에, 가람은 단번에 그게 현실인 줄은 알았다. 그러나 뒤이어 조심스런 손으로 등을 도닥여주던 것엔 또 다시 꿈인 줄 알았다. 등에 맞닿은 온기가 따뜻해 다시 꿈인줄 알았다가, 귓전에 속살여주는 괜찮다는 말에 왈칵 울음이 나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꿈인지 현실인지 수 번이나 헷갈리던 그 밤은 위로라는 명목으로 시작되어 몇 번이나 반복되고, 끝내는 무엇으로 시작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밤이 되고는 했다.


  가람은 가장자리에 슬쩍 걸터앉았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잠귀가 밝은 백건이 언제나처럼 발로 옆구리를 밀어낼 것 같아서였다, ...는 변명이 가장 그럴듯했을 거다. 살살 손을 뻗었다. 자국도 남지 않게 미약하게 붙든 옷자락을 당겼다. 백건은 잠꼬대도 않았다. 원망했느냐고? 가람은 문득 은찬이 남기고 간 말을 떠올렸다. 체념은 진즉 했다. 지상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제 아내와 행복하게 사는 그가 다 늙어빠질 때까지 제가 이곳에 쳐박히리라는 것은 명실상부한 일이었다. 원망, 이라. 가람은 괜히 그 단어를 한 번 곱씹어보았다. 원망이라는 단어 말고,



  "...차라리 잊지 말아달라고 하던가."



  멍청한 주은찬. 가람은 중얼이며 작은 소리로 웃었다. 잠든 백건의 얼굴을 이렇게나 오래 쳐다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밤이면 가람은 쉬이 잠들었고, 낮이면 백건은 망가진 것처럼 하루가 멀다하고 대련이나 하자고 뒤를 쫓아다녔으니. 선을 따라 살살 훑어내려가는 손끝이 마냥 느리기만 했다. 보고싶은건가? 지금 이렇게 보고 있는데? 슬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러니까, 가람이 이해하지 못하던 것들은 그런 거였다. 지나가는 모양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면 괜히 눈을 돌려버리게 되는 거.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에 걸음을 돌려 사라지는 그 뒷모습에 아주 오래토록이나 눈을 떼지 못하는 거. 아무렇잖게 뱉어낸 말에 자꾸만 이유를 찾게 되는 거.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은데, 겨우 고르고 골라 이야기를 하고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말 걸 하고 후회해버리게 되는 거. 별 것도 아닌 거에 생각이 나, 그 생각을 주체해버릴 수 없는 일 같은 거 말이다. 여즉 가람은 인간의 감정을 제대로 정의내리지 못했다. 인간들은 이 감정을, ... ... 사랑이라고 하는 것 같던데.


  가람은 완전히 침대 위로 올라갔다. 자는 얼굴이 어린애같았다고 하면, 너는 웃을까? 가람은 입을 다물고, 그 곁에 고개부터 박았다. 그 거리가 얼마나 가까웠냐면, 백건의 머리칼이 자꾸만 코를 간질여서 저도 모르게 재채기가 나올 것 같은 거리였다. 자꾸만 자세를 고쳐잡았다. 아무것도 그리울 게 없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었는데, 왜인지 자신이 없어졌다. 이 순간이 조금은 그리워질 것이다. 새로운 사신 후계자가 하늘에 오르면, 저들은 전대의 사신들처럼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겠지만, 그럴 일은 없다는 걸, 아마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테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꿈을 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꿈 속의 가람은 언제나와는 다르게 슬쩍 웃어버리고 있을 거였고, 멍걸이의 목줄을 쥔 손에 꾹 힘을 주고 있을 거였고, 그 곁에는, ... 그리운 네가 있을 텐데. 그 꿈은 아주 달콤한 꿈이 될 것이다. 평생 깨어나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괜찮다며 주억일 것이다. 아주 깊게 잠이 들어 누구도 깨우지 못할 테니, 꿈속에서 아주 오래토록 행복할 수 있을, 그 누구에게도 혼나지 않을 꿈. 가람은 눈을 감았다. 평소 지겹도록 맡은 꽃 냄새가 아니라 그랬나. 아니면 오늘 하루 답지 않은 행동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이유도 없이 유난히 그냥 평소보다 기분이 좋은 날이라, 발에 밟히는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가 은근하게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슬그머니 쥐어낸 손끝의 온기가 그리웠다. 수없이 많은 봄이 지나가던 순간순간, 가람은 하냥 그 온기가 그리웠던 거다. 그게 뭔지도 몰랐던 주제에.


  깊은 한 구석에 피어오르는 무언가를 알아차린 그 날은, 봄이 완전히 사그라들기 직전의, 어느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