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15
둥굴레차!
백건x청가람
네가
14.09.19
“청가람.”
징그럽게도 이름을 부르는 너의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청가람…”
입술을 깨물고 이불을 그러쥐었다. 대체 마음 한구석에서 나를 짓눌러오는 이 감정이 아픔인지 수치심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흐윽, 하는 신음이 꾹 다문 잇새를 비집고 새어나왔다. 아…파, 너의 널따란 가슴을 밀어내며, 나는 그제야 비명을 질렀다.
“청룡, 오늘 저녁은 고기.”
그렇게 말하며, 너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무슨 말인지, 알지? 스쳐지나가듯,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 손이 닿은 데에서부터, 무언가 천천히 썩어 들어가는 듯한 불쾌한 기분이 들어, 나는 그만 소름이 돋았다. 그 말은, 마치 암호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무심하게 뱉은 날이면 너는 등을 돌린 채 누운 내 이불을 잡아 끌고, 제 멋대로 나를 품에 안고서, 그리고 나를 탐했다.
너는, 그를 닮았다.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다. 억지로 맞춰오는 입술과, 그 사이로 간간히 뱉어내는 숨소리, 나를 내려다보며 짓는 웃음과, 한 치의 망설임 없는 그 손길까지. 그가 처음 내게 시선을 돌린 것은 내가 열 두 살이 되던 해였다. 언질도 없이 지상에 내려온 그는, 엄마가 아니라, 곧장 내게로 향했다. 어슴푸레하게 뺨 위로 빛이 쏟아지던 새벽 두 시였다. 규칙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잠이 덜 깬 얼굴로 그를 맞았다. 여태까지도 그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당신이 나를 찾아왔다.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기뻐서, 나는 퍼뜩 잠에서 깨며 환하게 웃었다. 그게 실수였다. 아무런 사정도 설명해주지 않고서, 나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아득아득 소리를 지르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내 어깨를 우겨 쥔 그의 손길은 그저 잔인하기만 했다. 유난히 새벽이 긴 날이었다.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는 흘깃 나를 내려다보더니, 구겨진 옷고름을 정리하며 방을 나섰다. 그와 내 사이엔 그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정적과, 비명이 가득했다. 나는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고, 그는 그 긴 시간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 딱 한 번. 그를 밀쳐내며 소리를 지르려 할 때, 그는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으며 조용히 해, 라고, 아주 조그마한 소리로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나는 하루 온 종일을 울었고, 그리고 그는 다시는 내게 그런 끔찍한 짓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단 한 순간도 그 날을 잊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네가 그런 그를 닮았다. 입을 틀어막던 손과, 귓가에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까지, 아주 지독하게.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하루에도 수백 번이나 드는 생각을 그렇게라도 토해냈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암만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에, 나는 그만 지쳐버렸다. 내 말은 올곧은 진실이었다. 꿈속에서 몇 번이나 너를 죽이고는 했다. 내 손으로 네 숨통을 끊으며 실성하듯 소리를 내어 웃고는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너의 웃음소리 뿐 이었다.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넌 못 견디게 될 걸.”
날 놀리는 것이다. 너는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누른 손에 힘을 주었다. 베개에 얼굴이 파묻혀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너와의 관계는, 모든 것이 역겨울 뿐이었다. 너는 내 정신에서부터 비롯한 모든 것을 손에 쥐고자 했고, 언제나 관계 중에 내게 사랑을 속삭이고는 했다. 사랑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네가 내게 속삭이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다. 그것은 그저 듣기 좋은 말로 포장되었을 뿐이고, 실상은 껍데기일 뿐인 말에 불과한데.
너는 언제나 그랬다. 억지로 턱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고, 제가 하라는 대로 따라주기를 바랐다. 너와의 정사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날이면, 나는 언제나 네 의견에 맞추었다. 네가 하라는 말을 그대로 뱉어내고, 원하는 때에 몸을 떨며 신음을 흘렸다. 그러면 너는 만족스런 미소를 띠며 잘했어, 하고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론 너의 손이 내 머릴 헝클어뜨리는 것은 죽도록 싫지만, 그보다 더 오랜 시간동안 너와 몸을 섞는다는 사실이 혐오스러울 뿐이었다. 나는 차마 너를 밀어낼 수 없었다. 언제나 너에게서 그의 모습이 겹쳐져보였고,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너는 그런 나의 상태를 알고 있었지만, 그건 네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짐승 같은 새끼.”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방엔 너의 냄새가 가득했다. 아직도 귓가에 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나는 인상을 구겼다. 조그마한 중얼거림이었는데도, 너는 그걸 들은 듯 웃음을 흘리더니만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 백 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쳐. 네 미소에, 나는 그만 울음이 나올 뻔했다.
“그럼 너는?”
잔인하고 잔인한 너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뛰쳐나갔다. 폐에 닿는 새벽의 공기는 그저 차갑기만 했다. 나는 그저 가만히 서서 끅끅 눈물을 삼켰다.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힘들어서, 나는 기다시피 벽을 짚으며 욕실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욕조 안에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다시 울음이 터져나왔다. 너와의 정사 후에 남는 것은 오직 그 뿐이다. 역겹고, 혐오스런 기분이 밀려들고,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수천 번. 네가 잠이 들 때까지 욕실에 처박혀 울었고, 군데군데 남은 너의 흔적과 끈적한 기억들이 몸을 좀먹는 듯한 불쾌한 기분을 느껴야했다.
“좋은 아침.”
네 웃음이 싫었다.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가 싫었고,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그 눈동자도 싫었다. 저는 아무렇지 않은 듯 구는 꼴도 싫었고, 징그러운 미소를 띤 채 다가와 어제는, 좋았어? 하고 묻는 그 비열한 목소리가 역겹도록 싫었다.
“……넌 있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네가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팔을 붙든 손이 덜덜 떨려왔다. 시야에 가득 네 얼굴이 들어찼다. 나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진짜 비열하고 역겨운 새끼야.”
그래, 차라리. 차라리 네가 죽어버린다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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