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굴레차!
주은찬x청가람
why not
14.09.07
“너는 왜, 나한테 그렇게 잘해줘?”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며 물어오는 그 말엔, 어떤 말이 정답이었을까.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내 진심을 말할까. 아님 거짓말을 보태서? 내가 고민할 틈도 없이, 너는 됐어, 하며 훽 등을 돌렸다. 나는 멀어져가는 네 모습을 바라보며, 휴대전화를 꺼내 짧게 짧게 메시지를 보냈다.
-가람아.
-가람아.
-가람아, 혹시 화났어?
-미안해.
-가람아, 내가 미안해.
-대답 못해서 화난 거야?
-사실은 말하려고 했는데, 좀 쑥스러워서 말 못했어, 미안해.
-가람아, 어디에 있어? 매화장?
-기다려, 금방 갈게.
“여기에 있었네?”
한참 찾았잖아.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리 말했다. 너는 세탁기 앞에 쭈그려 앉아 가만히 세탁물이 돌아가는 걸 바라보고만 있었다. 너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어서, 나는 네 어깨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는 가만히 이것저것을 속삭여주었다.
“미안해. 가람아.”
네가 이런 사과를 원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네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왜 그렇게 잘해주냐고?”
“…”
“난 네가 좋아, 가람아.”
그래서, 너한테 더더욱 잘해주고 싶어. 너는 거기까지듣고서 나를 밀치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딴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하고…… 멍청이 아냐?”
나를 지나쳐 도망치는 네 얼굴은 붉어져있었다. 나는 반쯤 넘어진 채로 그대로 몸만 돌려, 두 손으로 나팔을 만들며 네게 소리를 질렀다.
“가람아, 내가 미안하다니까.”
흔적도 없이 사라진 너를 생각하며 나는 더 이상 돌아가지 않는 세탁물을 끄집어냈다.
“또 청가람이야?”
“응, 전화를 안 받네.”
나는 휴대폰의 전원을 끄며 대답했다. 백건은 턱을 괸 채로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그딴 녀석 뭐가 좋냐?”
“글쎄…”
말끝을 흐리며 대답하지 못하자, 백건은 흐음,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네 어디가 좋느냐구. 그러고 보니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처음 너를 데리러 갔을 때부터 뭔가가 느껴졌다고 하는 게 나은가. 왜, 맨날 교과서에 나오는 그런 거. 뭔가 꽂혔다거나,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거나. 아니다, 그런 건가? 왜, 가람이는 또래 애들보다 왜소해서, 뭔가 가만히 내버려두면 불안하고… 그냥, 왜인지 곁에 있어줘야 될 것 같고. 나는 수업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집으로 가는 동안에도 내내 네 생각을 하다가, 집에 돌아와 네 얼굴을 바라보고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통, 통, 하고 도마 위에 놓인 당근이 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옆에선 물이 끓고 있고, 싱크대엔 물에 담긴 고깃덩어리가 있었다. 나는 의자에 가만히 기대고 앉아 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리를 할 때의 너는, 마치 기계 같다. 아무런 표정도 없고, 말도 없고, 칼을 쥔 손은 군더더기 없이 움직인다. 가람아. 조용한 소리로 너의 이름을 부르자, 너는 슬쩍 내 쪽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람아, 있지, 오늘 아침에 전화했던 거…”
“아, 그거.”
네 목소리는 건조하기만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거 있잖아, 왜 전화했냐면… 언제나처럼 네가 이유를 물어올 것 같아서 그에 대한 답을 해주려던 차에, 네가 말을 자르며 먼저 대답했다.
“일부러 안 받은 거야.”
네 목소리는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물이 끓는 소리와, 칼이 도마에 부딪히는 소리만 났다. 나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레 되물었다.
“……왜?”
“…왜냐니.”
당연히. 너는 그제야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방해되니까.”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지독하게도 예뻤다. 그 와중에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너는 알고 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을, 내가 너를 미워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넌 나를 이용하는 것이다. 나 또한 그것을 알고 있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네게 속아 넘어간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궁금하지?”
네가 웃음을 흘렸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일이 있었길래 네 전화를 안 받았는지. 뭐가 그리 방해가 되는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다.
“현우랑 키스
했어.”
“……”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무슨 말을 했어야 했는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내 표정은 아마 엄청나게 멍청해보였을 것이다. 네 얼굴에 핀 웃음만 봐도 알 수 있다. 나를 놀리는 거겠지? 그렇게 믿고 싶어서, 수십 번이나 내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가람이는 단순히 나를 놀리는 거야, 가람이가 그럴 리가 없어. 그리고 너는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웃으며 덧붙였다.
“현우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길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방으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건이 방으로 들어와 밥도 안 먹고 뭐하느냐 물었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가람아, 가람아, 가람아. 입속으로 수도 없이 네 이름을 불렀다.
-가람아.
-너는 왜 그렇게 나한테 상처를 주려고 해?
거기까지 썼다가 그만 지워버렸다. 구차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너를 좋아하니까. 그래. 나는 혼자 마음을 다잡으며 눈을 감았다.
그 날 새벽이었다. 잘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현우는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내일 아침 일찍부터 수련을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게 걱정이 돼서,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새벽 바람은 차갑고 깨끗한 냄새가 났다. 나는 조용히 현우의 이름을 부르며 걸음을 옮겼다.
왜인지 거실 문이 어렴풋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문틈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그 속으로 이따금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만히 발을 돌려 문 쪽으로 다가갔다.
“……어때?”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공자.”
확실한 현우의 목소리였다.
“…이번엔?”
“……그게……”
그리고 너도. 이어 다시 입을 맞추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잘 모르겠어? 너는 예쁘고 작은 소리로 웃으며 물었다. 현우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내가 너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네가 아는지 모르는지, 처음에는 가만히 소파에 앉아 손만 잡고 있던 네가 현우의 다리에 올라타 팔로 목을 감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너의 얼굴이 보였다. 붉어진 현우의 얼굴도. 현우는 어디로 시선을 둘지 모르는 것처럼 계속해서 눈동자를 굴렸다. 너는 거기에 멈추지 않았다. 고개를 틀어 현우의 목에 입을 맞추고, 다시 키스를 했다. 나는 더 이상 너를 바라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 방으로 돌아왔다. 왈칵 눈물이 났다. 너는 왜 그렇게 나한테 상처를 주려고 할까.
“주은찬, 학교는?”
“…아프니까, 빠질래….”
백건의 말에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한참을 만지작거리던 휴대 전화를 놓고, 네가 있는 거실로 향했다. 너는 문을 열고 들어온 나를 바라보더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잠깐 노려보고, TV를 껐다. 너는 자리에서 가만히 일어나 내게로 다가오더니,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쥐었다.
“주은찬.”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은 네가 이름을 불러주는 것도, 나를 붙잡아주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너를 보면 울음이 날 것 같아서.
“나 있지, 나쁜 짓을 했어.”
너는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짓눌렀다. 다리에 힘이 풀리듯 스르륵 주저앉았다. 너는 그런 내가 안쓰럽기라도 했는지,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추며, 내 귀에 조그마한 소리로 속삭였다.
“어젯밤에 현우랑 수도 없이 키스했어.”
하나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귀를 막고 싶었는데, 덜덜 떨리는 손엔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네가 문 너머에서 보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고.”
너는 마치, 악마 같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나를 끝도 없이 이용하고…
“백건이랑은 내기도 했고…”
차라리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루 온 종일, 시키는 대로 다 하는 거였어.”
근데 이건, 좀 야한 얘긴 거 알지. 너는 잔인하게 웃었다. 입꼬리를 올리고, 내 귓가에 몇 번이나 속삭였다. 지금까지 나는 언제나 너의 말에 괜찮다, 라고 말했다. 등을 쓸어내리며 괜찮아, 하고. 너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동시에 내 자신에게 거는 마법이기도 했다. 너를 그렇게 위로하면, 마치 나 자신도 위로가 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번엔 도저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넌 아마, 영원히 나를 떠나지 못할 거야.”
왈칵 울음이 터져버렸다. 너는 나를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난 영원히 너한테 상처를 줄 거고.”
너는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나는 결국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너는 거기까지 말하고 허리를 펴 꼿꼿하게 서고,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낮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넌 항상 친절한 척을 해. 사실은 그렇지도 않으면서. 사실은 속도 좁고, 욕심도 많으면서 그러지 않은 척을 하면서 좋은 사람인 체 하지. 난 있지, 너는 웃는 얼굴로 잔인한 말을 쏟아냈다.
“난 네가 역겨워, 주은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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