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다섯 개
배탈, 메이플, 라이터, 가슴, 섹스
14.07.29
“단거, 많이 먹으면 안 좋대요. 그러니까 샌드위치 먹어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자마자 종업원을 부르고, 음식을 주문했다. 나는 샌드위치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반박할 여지도 주지 않았다. 주문을 취소하려 다시 종업원을 부르는데, 그녀가 입을 떼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많이 약했어요.”
여자는 그렇게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듣기로는 자주 쓰러졌었다고 했나. 유난히 사건사고가 많았대요. 병원을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한 달, 두 달 하는 장기 입원이 아니라 일 주, 이 주 하는 짧은 사고들. 다칠 거면 제대로나 다치던지, 어정쩡하게. 덕분에 수업을 빠지고, 혼자만 진도를 못 따라서 성적은 떨어지고 원하는 대학도 못가고, 우습지 않아요?”
여자는 세 겹짜리 핫케이크를 한 겹씩 잘라 먹었다. 밑의 장에 자국이 남지 않게 조심조심 자르고, 한 겹을 모조리 다 먹은 후엔 다시 조심조심 다음 장을 잘랐다. 연신 오물거리는 입술은 진한 붉은 색이었다. 그녀는 한 겹마다 다시 시럽을 뿌렸다. 아니, 뿌렸다기보다는 ‘부었다’는 표현이 옳을 지도 모르겠다. 핫케이크는 시럽으로 범벅이 되어, 저것이 과연 빵인지 시럽에 절인 무엇인지도 모를 정도로 보였다. 나는 예의도 잊은 채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봤고,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단거, 많이 먹으면 안 좋대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내 앞에 놓인 샌드위치를 가져갔다. 그녀가 주문했던 핫케이크의 접시는 깨끗하게 비워진 후였다. 뭐야, 하는 생각이 들면서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새벽 세 시에 갑작스럽게 상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미안한데 말이야’하고 시작한 그 말은 원고의 수정을 원하는 말이었고, 덕분에 쓸데없이 새벽부터 일을 해야 했다. 밥을 먹을 틈도 없이 여기저기에 불려나갔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여자는 전화해서 내게 말했다. 밥이라도 사줄 테니 나오라고. 그래놓고 지금 내 걸 뺏어먹겠다? 내 진심은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여자는 내 표정에 까르르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 뿐이었다. 이어 테이블 귀퉁이에 있던 시럽을 ‘부어내기’ 시작했다. 내 샌드위치도 여자가 먹은 핫케이크와 똑같은 꼴이 되었다.
“…그럼 당신은요? 그건 단 게 아니고 뭡니까?”
“전 괜찮아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이건 뭐랄까, 음… 특별한 시럽이요?”
“특벼얼?”
내 목소리엔 짜증이 묻어났다. 접대용 미소를 지으려 아무리 노력해도 굳어진 근육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다른 가게보다 더 찐득하잖아요. 진하고.”
“거기서 거기 아닙니까? 똑같은 메이플 시럽이잖아요.”
가시가 돋은 내 말에 여자는 아닌데-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여자는 아닌데, 아닌데 하고 몇 번이고 말하면서 손을 멈추지 않았다. 나이프가 샌드위치를 갈랐다. 날카롭게 선 날에 시럽이 묻었고, 그녀가 칼날에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위험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제엔장, 빌어먹을. 쓸데없이 상상력만 풍부해서는. 여자가 칼날을 핥는 그 모습에 다른 장면들이 겹쳐보였다. 그녀는 힐끗 나를 올려다보았고, 풋, 하고 웃음을 흘렸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여자가 지껄이는 말들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나는 속으로 수십 번이나 기도문을 외우고, 어젯밤 보았던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아프리카의 휑한 초원에 무리를 짓고 있던 얼룩말. 수풀에 숨어 그를 노리는 사자. 사자가 뛰어오르고, 그와 동시에 얼룩말 무리가 흩어지던 모습이 그려졌다. 그제야 여자의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표정이 영 아니던데, 배탈이라도 났나 봐요?”
여자는 노골적으로 나를 비꼬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지고, 화가 치밀었다. 새벽 세 시. 밤 열 시. 시침이 열 아홉 번을 돌 동안 일에 치인 사람을 불러 앉혀놓고, 뻔뻔하게 남의 음식까지 뺏어먹고는, 사람을 놀리는 이 여자의 행동에 짜증이 솟구쳤다. 그래, 분명 그런 상상을 한 건 내 잘못임이 분명하지만. 나는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게요?”
“신경 끄십쇼.”
지갑에서 오만원 권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빌지엔 선명하게 24,700이라는 숫자가 인쇄되어있었다. 여자는 턱을 괸 채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등을 보인 건 나였다. 자리를 벗어나려던 찰나에, 여자의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랑 섹스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요?”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이 힐끗 이쪽을 쳐다보고는 저들끼리 귓속말을 나누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웃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로, 그녀는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밥 먹고 섹스하려는 거 아니었나. 이 돈은 뭐에요? 남는 돈으로 모텔가자구요?”
주위의 시선에도 여자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만 원으로 계산을 하고는 남는 돈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여자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내 손목을 붙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열시 오십 분…. 뭐, 나쁘지 않네요.”
그렇게 말하며 여자는 앞서 걸었다. 입술과 똑같은 빨간 하이힐이 굽소리를 내며 점점 멀어졌다. 나는 못에라도 박힌 듯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상황판단이나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이나 아무런 것도 못하고 서있기를 몇 분, 멀리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나는 홀린 듯 그녀를 쫓았다.
여자는 가방에서 열쇠를 꺼냈다. 한 발을 들이자마자 현관엔 자동으로 불이 켜졌고, 여자는 자연스레 ‘들어와요’하고 나를 이끌었다. 작은 공간이었다. 현관을 지나자마자 바로 한 가운데에 침대가 있었고, 침대를 둘러싸듯 동그랗게 책상이며 화분이며 하는 것들이 늘어져있었다. 나는 벽에 붙은 스위치를 켰다. 집안은 온통 흰색으로 가득했다.
“아, 이게 아니에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스위치를 끄고 침대 옆에 있던 스텐드를 켰다. 흰색의 가구에 붉은 빛이 돌자 퍽이나 야하게 느껴졌다. 여자는 곧장 내게 매달려 키스하고, 혀를 섞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옷을 벗고, 내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여자와의 섹스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유난히 예쁘던 젖가슴 뿐 이었다.
담배라도 피려 셔츠의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낼 때였다. 여자는 피곤하지도 않은지 주섬주섬 옷을 걸치더니 내게 물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아까 밥 먹지 않았어요?”
내 말에, 여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그랬어요?”
그러더니 계란과 핫케이크 가루를 꺼내 핫케이크를 만들고, 세 겹으로 쌓인 핫케이크를 내 앞에 놔주었다. 여자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한 겹씩 조심스레 먹었고, 시럽을 붓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섹스가 끝난 후라지만, 피곤하지도 않나? 밥 먹은 지 채 두 시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나는 멍하니 여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단거, 많이 먹으면 안 좋대요.”
하고 말하며 내 앞에 놓인 핫케이크를 가져갔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당신은요?”
“전 괜찮은데요.”
내 물음에 여자는 무덤덤하게 대답하며 다시 시럽에 절여진 핫케이크를 자르기 시작했다. 핫케이크 두 접시를 깨끗하게 비우고 그녀는 잠깐을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오 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참, 그거 아세요?”
“뭘요?”
“단거, 많이 먹으면 안 좋대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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