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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사랑니, 21살의 여름, 세 살 차이

14.09.01







나는 너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래서, 요번달부터 우리 학교 앞에 편의점에서 알바한대! 그럼 맨날맨날 볼 수도 있구~”

 


나는, 너를, 좋아한다.


 

나 너무 떨리는데 어떡하지? 얼굴 어떻게 봐~ 그러니까, ? 아침마다 잠깐씩만 편의점 들렀다 오면 안 될까? 약속할게, 오래도 안 있을 거구, 앞으로 절대절대 지각도 안할게. ? ? 부탁해애,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구~”

 


나는 너를 좋아하는데.

 


알았어.”

진짜? 고마워!”


 

너는 내 목을 끌어안고 앞으로 늦잠도 안 자구, 메시지도 바로바로 답장하구 졸리다고 투정도 안 부릴게. 역시 너 밖에 없어, 하고 몇 번이고 거듭해서 말했다.


 

너랑 친구라서 다행이다.”


 

너는 그 사소한 말에 내가 상처받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내 하루의 시작과 끝은 오로지 너 뿐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씻자마자 전화로 너를 깨우고, 밤늦게까지 너와 메시지를 주고받다 잠이 들었다. 둘 다 유난히 연락하는 걸 좋아했고, 스킨십을 좋아했다. 학교에 갈 때도, 점심시간에 줄을 서 있을 때에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장난을 치곤 했다. 너를 좋아하려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길을 걷다 네 생각이 나고, 너와 나눈 말들을 곱씹어보고, 네 생각으로 하루를 보내던 날, 그 날에 내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데에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 처음엔 단순히 친구로서 너를 많이 좋아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방학 숙제의 일환으로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던 날, 사랑니가 났다던 의사선생님의 말에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네가 사랑니는 사랑이 시작될 때 나기 시작한다, 라며 유난을 떨었다. 나는 여전히 네가 친구인 줄로만 알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끈질기게 물어오는 말에 없다고 답했다. 그걸 깨달은 것은 졸업을 앞둔 12월이었다. 너는 예전에 말하던 편의점에서 알바한다던 오빠와 잘 되어가는 중이었고, 그걸 하루하루 내게 보고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 카페가서 얘기도 많이 하구, 심야영화도 보고 오구, 공원에서 산책도 하고 그랬어.”

그렇구나.”

근데 있지, 역시 세 살 차이는 조금 걱정스러운가? 다른 애들도 그러고 있구언니도 그렇구


 

너는 구구절절 하소연을 했다. 사실은 어제 네가 그 오빠와 뭘 먹었고 무슨 영화를 봤고 하는 것들은 아무 관심이 없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럼에도 그걸 가만히 듣고 있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게 너의 하루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런 사소한 것까지도 알고 싶기 때문에?

 


.”

뭐야, 내 얘기 듣고 있어?”

듣고 있지.”


 

나는 대충 받아주며 대답했다. 나는 너를 좋아해. 하루에도 수십 번이나 입속에서 흩어지는 이 말들을 나는 과연 죽을 때까지 안고 갈 수 있을까. 영원히 네 곁에 있기 위해서는 그래야한다. 숨기고, 감춰서, 그 누구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깊숙한 데에 숨겨 나조차도 찾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너와의 어중한 관계를 끌고 졸업을 했다. 늦은 때였으나 눈이 왔고, 아이들은 모두 카메라니 캠코더니 하는 것들을 챙겨와 마지막 추억을 남기기에 바빴다. 나는 여전히 네 옆에 있었다. 너와 나란히 앉아 너의 손을 잡고.

 


오늘은 집에 같이 못 가겠다, 그치?”

그러네. 부모님들 오신댔지?”

. 좀 아쉽다.”

다음에 만나면 되지.”


 

그치, 평생 안 만날 건 아니니까. 그날따라 너의 그 장난스런 말이 왜 그렇게 아렸는지 모르겠다. 사랑니를 뽑아내지 않은 입속은 여전히 아파왔다. 졸업식이 시작되는 강당에서도, 우리는 나란히 서 있었다.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졸업 같은 거, 안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도.”

무슨 고민 있어? 표정이 안 좋네. 졸업식이라 그런가.”

 


너는 그렇게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너를 따라 웃으며 그런가봐, 하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너는 이해해주지 않을까. 확신이 없는 물음만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있지.”

 


말은 언제나 생각보다 빠르게 나간다. 나는 너의 옷자락을 붙들고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서쪽계단으로 널 데려갔다. 너보다 한 걸음 앞서 걸으면서, 나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을 했다. 정말로 말해야 할까. 오늘이 아니면 영영 말하지 못할 것 같은데. 그 두 가지 생각이 번갈아가며 나를 괴롭혔다.

 


왜 그래?”

하고싶은 말이 있어서.”

뭔데?”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다. 단순히 내 마음이 편하겠다는 생각 하나뿐이었다.

 


이기적이라서 미안해.”

 


네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만을 쏟아냈다.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지만.”


 

네 눈을 보면 더 이상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아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내 이름을 부르려는 네 입술이 보였다. 나는 그걸 가로채듯 말했다.

 


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친구였던 건 아니야. 그런데 난 너만큼 좋은 친구를 만나 본 적도 없고, 다시는 못 볼 거라는 생각까지도 했어. 그래서 더더욱 이 말을 하는 게 어려웠는데, 그래도 오늘이 아니면 못할 것 같아서……


 

거기에서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 한 마디에, 이 짧은 순간에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들이 무너져버린다. 그런 생각을 하니 무서워졌다. 어쩌면 더 이상 너를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고, 다시는 너와 웃으며 메시지를 주고받는 일도 없을 테고, 네게 연락이 온 걸 보며 기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네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준다면 고맙겠지만, 아니라면? 나는 주먹을 고쳐 쥐고 나지막하게 고백했다.


 

, ……널 좋아해.”


 

그 후로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네 손에 쥐어져있던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졌던 건 기억난다. 네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난 것까지도 눈에 보이듯 선명하다. 나는 네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렀고,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마 무서워서 네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너는 점차 내게서 멀어지더니,


 

미안.”

 


이 한마디만을 남기고 날 두고 떠나버렸다.

 

나는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여전히 너를 잊지 못했고, 요즘도 네 생각을 한다. 너와 함께 찍은 사진이나, 너와 주고받은 메시지는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우지 못했다. 너는 그렇게 잔인하게 나를 떠나버렸는데, 나는 계속해서 너를 그리고 있었다. 늦은 여름이었다. 여름방학의 끝자락에,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귀찮아 침대에 누워 하루종일 노트북만 붙잡고 있던 때였다. 뚜르르, 하고 울릴 리 없던 전화기가 울렸다. 신호는 얼마 가지 않아 끊어졌고, 곧 뚜-하는 긴 소리와 함께 드문드문 끊어지는 말소리가 들렸다.

 


-안녕. 오랜만이야. 사실 얼굴을 보고 말하고 싶어서 네가 다니는 대학도 찾아갔는데, 차마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단 한 마디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가만히 전화기 앞에 가 서서 너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어? 분명 너라면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너는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몇 년 전과 마찬가지로, 나와는 전혀 관련 없는 너의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너는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더니, 한참이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졸업식에 나한테 했던 말 있잖아.

 


너는 조심스레 그 이야기를 꺼냈다. 한마디, 한마디 사이에 긴 공백이 있었고, 무언의 결심이라도 하듯단호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진심이었니?


 

스물 한 살의 여름, 잔인하고 잔인한 너의 그 말에, 내 첫사랑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