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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제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요, 권유, 회유, 강요, 부러진 이빨

14.08.28







아버님, 저 왔어요.”



목소리가 들리자,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여자는 품에 한아름 안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는 냉장고를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상을 차렸다. 노인이 좋아하던 갈치조림이었다. 여자는 노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제 몫의 밥은 물론 수저 한 짝도 놓지 않았다. 여자는 노인이 밥을 먹는 걸 아주 오랫동안이나 바라보다가, 노인이 수저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뒤따라 일어나 노인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더 이상 먹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시위라도 하는 것인지 노인은 상 아래로 손을 내리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이거, 다 드셔야 해요.”



여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숟가락 위에 쌀밥과 나물을 올려 노인의 입에 가져다 대었다. 노인은 그제야 입을 벌리고 밥을 먹었다. 식사시간은 하염없이 길어졌다. 자꾸만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젓는가 하면 밥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몇 번이나 토해내기도 했다. 여자는 묵묵히 모든 일을 감수했다. 식사가 끝나자 노인은 물끄러미 시계를 바라보다 지팡이를 챙기고 신발을 신었다.



아버님, 어디가세요?”



설거지를 하던 여자가 쫓아와 물었지만 노인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여자는 노인의 뒷모습과 시계를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납득했다. 오후 두 시. 언젠가 노인의 아들인 남편에게서 그러한 말을 들었던 적이 있어 알아차릴 수 있던 점이었다. 노인은 어렸을 적부터 시골에 살며 농사를 지었다. 어려서도 그랬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 그랬다. 노인에게는 아들 세 명과 딸 두 명이 있었는데, 남편인 막내아들만을 끔찍하게 사랑했다.

언제나 두 시가 되면 어린 아기였던 남편을 업고 밭이고 개울을 쏘다녔더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애를 돌보기는커녕 밥 한 술, 손도 몇 번 잡아주지 않고 혼자서 나다녔으니 노인의 아내도, 다른 자식들도 모두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아이가 걸음마를 떼고, 말을 시작하고, 조그마한 학교에 들어갔을 때에도 노인은 오후 두 시가 되면 아이의 손을 잡고 이것은 무슨 풀이고 저것은 무슨 구름이니 하는 것들을 가르쳤다.

물론 아들과 함께 걷는 것은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자연스럽게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노인은 다시 홀로 걷기 시작했다, 몇 년이나 아들과 함께 걷던 길을. 그리고 그 습관은 자식들을 따라 시골에 있던 땅을 모조리 팔고 서울로 올라오게 된 이후에도 달라질 줄을 몰랐다.

여자는 노인의 등 뒤에 대고 조심히 다녀오세요.’하고 배웅했다. 작은 소리였음에도 용케 그걸 들었는지 노인도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서울로 올라온 노인의 산책길은 지하철을 타고 열댓 정거장을 가야 하는 조그마한 호수가 있는 공원이었다. 노인은 공원을 두어 바퀴 정도 걸었고, 벤치에 앉아 호수에 떠다니는 오리들을 바라보며 긴 숨을 쉬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저 멀리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노인은 걸음을 옮겨 얼른 지하철에 탔다. 지하철에 앉아 가만히 열차 안을 바라보는데, 손잡이에 몸을 기댄 채 졸거나, 자리에 앉아 가방을 끌어안은 직장인들을 바라보며, 아주 오랜만에 아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버님! 휴대전화 또 두고가셨죠!”



집에 돌아오자마자 여자는 울며 소리를 질렀다. TV위에 얌전하게 닫힌 은색 휴대전화 하나가 보였다.



제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요!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휴대전화는 꼭 챙기시라고!”

또 쓰러지신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여자는 끝끝내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여자가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반 년 전에, 노인은 갑작스런 심장 발작으로 응급실에 실려 간 적이 있었다. 그 날에도 아들은 찾아오지 않았다. 오직 그녀만이 찾아와 눈물을 흘리고 노인의 손을 붙들어주며 도와 줄 뿐이었다. 어째서인지 그녀는 그 일에 책임감을 가졌다. 그 일이 생각이 났을 터였다. 노인은 조심스레 여자의 손을 붙들고 미안하다는 듯 입을 뻐끔거렸다. 그녀는 한 시간이 지나서야 진정을 했고, 그 사이 경찰에 신고까지 했던지 다시 전화를 해 몇 번이나 사과했다.

여자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 노인의 손을 붙들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역시 아버님,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저희랑 같이 살아요. 아이들도 아버님을 보고 싶어 하는 눈치고, 남편도



노인은 거기까지 듣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여자는 노인의 거절에 알겠어요, 하고 수긍했다. 지금껏 몇 번이나 권유했는지 모른다. 처음은 조심스레 권했고, 그 다음부터는 아이들이나 남편의 이야기를 들먹이며 회유를 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나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여자도 더 이상 거기서 묻지 않았다. 노인의 생활은 걱정되지만, 거절한다면 강요할 마음도 없다.





 

여자를 배웅해주고 집에 돌아온 노인은 뜨거운 물에 몸을 씻으며 끝이 다 닳은 지팡이를 닦고, 또 닦았다.

그 지팡이는 아들이 사준 것이었다. 노인의 허리가 점점 굽어지기 시작하던 때에, 그는 그 지팡이를 들고서 찾아왔다. 나무로 된 고급스러운 디자인이었다. 그 때에 아들이 사준 것이라며 어찌나 자랑을 하고 다녔던지. 노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흘렀다. 노인은 여전히 그 지팡이를 짚고 있었고, 그 날 이후 아들은 단 한 번도 노인을 찾아오지 않았다.

부러진 이빨 대신 틀니를 끼기 시작한지도 어언 십여 년이 지났다. 노인은 머리맡에 틀니를 담근 물을 두고 침대에 누웠다. 언제부터 말을 하지 않게 된 지도 잘 모르겠다. 아내가 죽고 나서였던가. 그때부터 죽 집에 혼자였으니 그 세월을 가늠할 수 없다. 언젠가 부터는 날짜를 세는 것조차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노인은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제 쪽을 돌아보며 아빠하고 부르는 어린아이들이 있었고, 바로 곁에는 젊었을 적의 아내가 노인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노인은 아내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천천히 걸었다. 저들보다 한참을 앞서가는 아이들의 뒤를 쫓았다. 그러고 보니 단 한번이라도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걸었던 적이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노인은 더 오래토록 걸었다. 아주 느린 걸음으로, 오래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