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굴레차!
백건x청가람
Dreaming
14.10.03
새하얗게 내리쬐는 볕에 눈이 아팠다. 커튼을 치는 소리가 들리고, 귓가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일어나세요. 평소랑 유난히 다른 다정스런 목소리였다. 어깨를 두드려오는 가벼운 손길도, 도련님, 도련님하는 부드러운 어투도 오죽하면 이상하게 느껴졌을까. 살랑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치맛자락이 흔들렸다. 아, 다리. 예쁘다. 평소라면 곧장 뭐요? 하며 짜증스런 목소리가 들려올 텐데 오늘은 그러질 않는걸 보니… 꿈인가보다고 했다.
“…청…가람.”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푹 잠겨버려서 쩍쩍 갈라지고… 너는 그걸 듣지 못한 듯 통 대답이 없었다. 가늘게 뜬 시야로 길고 얇은 손가락이 보였다. 손가락으로 빵 귀퉁이를 잡고서, 반대편 손엔 버터를 바른 나이프를 들고 있는 채였다. 새초롬하게 다문 입술이나, 저를 바라도 보지 않은 그 붉은 눈이 왜 그렇게 예뻐보였는지.
“도련님, 이제 일어나실…”
“청가람.”
답지 않게 잔뜩 예의를 차린 말, 어깨를 흔드는 손길. 그게 마치 꿈만 같아서, 아, 정말로 꿈이로구나, 하고 확신을 했다. 그래서였을까. 무서울 게 없었다. 꿈속의 너는, 어쩌면 나를 좋아해줄 지도 모르잖아. 그런 생각을 하자 걷잡을 수가 없어서, 나는 내 어깨를 흔드는 네 손을 잡아끌었다. 한 손에 들린 토스트가 이불 위로 떨어져서 아, 하고 놀라는 네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여전히 목소리는 잠겨서, 영 듣기 싫었다. 네 몸이 기울어지며 어정쩡한 자세가 되어선, 넌 중심이라도 잡으려했는지 무릎을 침대 끝에 걸쳤다. 단추 하나가 채 잠기지 않은 틈으로 쇄골이 보였다. 그 끝에 좁은 어깨가 있었고, 고개를 들자 딱 네 눈이 보였다. 뭐, 뭐하는 건데요? 당황스런 네 얼굴이 우스워서, 푸후, 하고 웃음을 흘렸다. 아니, 뭐, 그냥.
입술이 닿은 건 순간이었다. 금방 붉어지는 네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맞췄다. 너는 의외로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얼굴을 붉히고, 눈을 감고, 옅은 숨을 뱉었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야해보였는지도 모르겠다. 평소라면 어땠을까. 아마 바락바락 악을 쓰며 나를 밀어내지는 않았을까. 꿈이라도 좋다. 아니, 네가 이렇다면,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 아주 오랫동안 입을 맞추고 있었다. 새빨간 얼굴로 네가 내 어깨를 밀었고, 그제야 숨을 뱉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왜, 무슨 문제 있어? 할 말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할 말이 없었던 것인지, 너는 가만히 입술만 깨물었다. 왜 애꿎은 입술한테 그래. 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너는 여전히 저항 한 번 하지 않은 채로, 간간히 내 이름을 부를 뿐이었다.
“난 차라리 이게 현실이었으면 좋겠어.”
그럼 아주 오래토록 너를 안을 수 있을 거 아니야. 화악 얼굴이 붉어지는 게 보였다. 너는 완전히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몸을 숙인 채였다. 이거, 그림이 묘하지? 장난스레 건넨 말에 짜증나,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어오는 바람에 커튼이 흔들렸다. 구두 한 짝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리고 시간이 멈춘 듯 했다. 곧 들려온 네 목소리에 의해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지만. 차, 다 식겠어요. 왜인지 꿈속의 네 목소리가 마냥 걱정스러워보였다. 아, 꿈이라서 그런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네 어깨에 얼굴을 박았다. 됐어, 이따 다시 타다주면 되지. 어차피 지금 별로 안 먹고 싶어.
너를 끌어안고 아주 오랫동안이나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바로 앞에 네가 있었고, 눈이 마주쳤고, 네가 먼저 입을 맞추기도 했다. 행복해서, 그만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네 눈은 행복에 취해있었고, 그걸 바라보는 내 눈 또한 별반 다를 것이 없었을 텐데.
“도련님.”
응. 나긋나긋한 네 목소리가, 참 듣기가 좋았다.
“일어날 시간이에요.”
그 말로 세상이 바뀌었다. 품에 꼭 들어와 있던 너는 어느새 창가에 서서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차갑게 식은 토스트와 차가 보였다. 나는 물끄러미 너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꿈이었지?”
“뭐에요, 악몽이라도 꾼 거에요?”
악몽은…아닌데. 네 시선을 맞추기가 어려워 눈을 돌렸다. 굳이 말하면,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다정하고 상냥한 너는, 꿈속에만 존재했다. 손을 뻗어 가만히 찻잔을 들었다. 여전히 네 잔재가 남아있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침대 아래로 시선을 주었다. 역시, 떨어진 구두 따위가 있을 리가.
꿈속의 너를 그리는 와중에도 네가 밟혔다. 냉정한 표정,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는 눈길, 굳게 다문 입술. 꿈속의 너와는 정말로 너무나도 달라서, 그래서 더 이것이 현실인 것임을 깨달았던 것일까.
“아, 도련님.”
네 목소리가 들렸다. 꿈에서와는 다르게, 아무것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 너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차라리 아쉬운 모습이 보였더라면, 지금처럼 이렇게 네가 겹쳐보이지는 않았을 텐데. 응.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지근하게 식은 차가 주저 없이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갔다.
“저 오늘로 그만둬요.”
풉. 목이 막히는 것 같았다. 입에 머금은 차가 입 밖으로 새나오고, 그리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흘리시면 어떡해요, 침대 더러워지게…. 너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로 다가왔다. 확 네 냄새가 풍겼다. 꿈속에서 수도 없이 맡았던 네 살냄새. 붙잡으면, 그래도 떠난다고 할까? 나는 이미 현실과 꿈을 분간하지 못했다. 현실의 네가 꿈속의 너 같았고, 꿈속의 네가 현실의 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그러진 머릿속으로 멀쩡한 생각을 하는 게 버거워서, 나는 그만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그래서?”
순환이 멈춘 머릿속으로 멀쩡한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셔츠깃을 잡아끌며 짜증스럽게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 아니다. 이유는 알고 있다. 다시는 너를 만날 수 없으리라는 그 불안감에 비롯된 것이다. 넌 적잖이 당황한 표정으로 내 손을 떼어내며 까칠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만둔다구요.
“누구 맘대로?”
넌 참으로 잔인하고 잔인하다. 네가 이곳에서 일한지 고작 한 달이 지났다. 고작 한 달. 일수로 치자면 30일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인데, 넌 그 새에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네 어깨를 짓눌렀다. 넌 침대에 쓰러진 채로 내 어깨를 밀치며 저리가요, 하고 말했다. 네가 야속하기만 했다. 조금이라도 네가 내 곁에 남아주기를 바라는데, 너는 왜 끝까지 그걸 몰라주는 걸까.
“넌 내거야, 청가람.”
짓눌린 네가 이를 갈았다. 네가 미웠다. 어떻게든 내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네가.
“내 허락 없이 네가 여길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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