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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AU. 백건과 청가람이 같은 중학교에 다녔을 설정.

글쟁이 문장 파레트 중 '손목에 얼룩이 졌다'를 참고했습니다.

@callo_bot의 내용을 참고했습니다.

둥굴레차!

백건X청가람

손목에 얼룩이 졌다.

14.10.11







교복 소매에 얼룩이 졌다. 펜인지 뭐 때문인지 모를 푸른 얼룩이. 난 그걸 아주 오랫동안이나 바라보다 자켓 주머니에 대충 손을 구겨 넣었다. 한참을 말없이 걷는데, 뒤에서 네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서둘러 등을 돌린 곳엔 네가 없었지만 찌링, 하고 맑은 소리를 내며 자전거 하나가 곁을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네 웃음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남았다. 사내놈답지 않게 까르르 웃던 네 웃음소리. 문득 그 웃음소리가 너무나도 듣고 싶어서, 휴대폰을 들어 네게 메시지를 보냈다.


 

[청가람.]

 


네가 그러지 않았던가. 이름만 보내주는 것으로도 족하다고. 제 이름만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이름을 부르면 언제나 십 분 이내로 답이 오곤 했었는데. 네게서 답이 도착하지 않은 것은,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스크롤을 아무리 올려도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제, 일주일 전, 한 달 전, 한 달 하고도 이주일 전, 두 달, 넉 달, 반 년, 일 년 전까지. 그토록 긴 시간을 뒤로 돌렸는데도 네게 온 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일 년 내내 네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네가 보고 싶을 때마다 이름을 불렀고, 너를 그렸지만 네게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네가 내게 보낸 메시지는,

 


[좋아해, 건아.]

 


하는 상냥하고 다정스런 말이었다. 어쩌면 네가 내게 단 한 번도 해주지 않은 말이었을지도. 다시금 네 생각이 났다. 너는 단 한 번도 환하게 웃어주지 않았지만, 이따금 수줍게 웃고는 했다. 이를 테면, 체육관에서 몰래 훔쳐왔던 매트리스 위에 앉아 가만히 너를 바라보고 있던 때. 슬그머니 네 손등 위에 내 손을 겹치고 네 이름을 부르면, 너는 내 쪽을 흘깃 쳐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띠고는 했다. 그걸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사랑스럽고 어여뻐서, 그래서 수도 없이 네게 입을 맞추고 너를 좋아한다 속삭였던 것이다.


그 때는 내가 완전했던 시간이었다. 아니, 내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가 우리였고, 우리가 우리로써 완전했던 시간


너를 만난 것은 열다섯이었다. 교실 맨 뒷자리에 혼자 앉아 묵묵히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네게 시선이 갔고, 그래서 못본 척을 할 수가 없었다. 까탈스럽고 예민했지만 퍽이나 죽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등굣길에도, 하굣길에도 너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고,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너를 떠올리는 데에 사용했다. 친구들은 네가 웃는 법도 모른다고 했지만 내 기억으로, 넌 내게 꽤나 웃어주었던 것 같았다.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하루 종일을 붙어 앉아 네게 말을 걸어대고, 주말에도 불러내 먹을 걸 사주고, 네게 이야기를 했다. 너는 그저 듣기만 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며칠이 지난 날마다 아, 너 전에, 라고 입을 떼며 말하는 걸 보며 네가 똑똑히 듣고 있다는 걸 알았다.


너는 유난히 사소한 데에 집착을 했다. 오늘처럼 내 소매에 얼룩이 묻어나던 날, 너는 그걸 가리키며 이게 뭐야, 라며 핀잔을 주었다수성 펜이 물에 묻어 자켓에 진한 얼룩이 졌던 날이었는데, 너는 그걸 보며 예뻐, 라고 말했다. 슬쩍 나를 올려다보며, 무슨 이유에선지 얼룩이 진 손목 안쪽에 입을 맞추며, 희미하게 웃는 너를 바라보면서, 나 또한 너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은 영원한 비밀이었다. 그런 너에게 남다른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은, 글쎄. 언제였을까. 너를 알게 된 지 반 년이 지나던 날? 일 년 째 되던 날?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무슨 이유인지 말도 해주지 않고 눈을 붉히며 끅끅 우는 너를 끌어안고 한참을 달래줬더랬다. 그 조그마한 입으로 무어라 하는 것만 같았는데 그걸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날의 네가 유난히 예뻐 보였던 탓이다. 새빨갛게 물든 눈가가, 나를 올려다보던 눈이, 휴대폰을 꼭 쥔 자그마한 손이 견딜 수가 없이 예뻐서, 네가 무어라 웅얼거리는지도 알아듣지 못한 채 네 입술에 키스했다. 그 일을 기점으로 너는 나를 의식하게 되었다. 시선을 돌리다 눈이 마주치면 얼른 얼굴을 돌렸고, 손끝이 스치면 얼른 손을 움켜쥐며 얼굴을 붉혔더랬다. 나는 그게 참 귀여워 너를 그렇게 자주 놀리곤 했었다. 체육관에서 훔친 매트리스 위에 앉아 서로의 손을 붙들던 날들도 딱 그 때쯤 이었다. 너는 그 날도 여전히 내 소매에 물든 얼룩을 가리키며 까르르 웃었다. 여태 안 지워졌네, 라고 말했고, 그날도 입을 맞춰주며 그 얼룩이 예쁘다고 말해서, 나는 결국 그 계절이 지나도록 그 얼룩을 지우지 못했다.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나서, 우리는 우리가 아니게 되었다. 완전하다 믿었던 그 시간은 나를 비웃듯이 지워져버렸고, 나는 더 이상 네 앞에 나타날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너는 달랑 저 문자 하나만을 남겨놓고, 영영 사라져버렸다. 나는 다시는 네 모습을 찾을 수 없었고, 너 또한 나를 찾지 않았다. 처음엔 네 생각이 났다. 아주 많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네 웃음소리나, 네 뒷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처럼 맨 뒷자리에 앉아 멀거니 창밖만 바라보고, 급식시간이 되면 미적거리며 앞서 걷고, 매점에 가선 흰 우유와 카스테라를 사먹고, 비가 오는 날이면 슬리퍼를 끌고 와 교문 앞에서 혼이 나고, 제 모습이 다 비치는 투명한 우산을 쓰고, 헐렁한 자켓의 소매를 한 번 접어 올리면서도 졸업하던 날까지 분명히 이게 딱 맞게 되리라 바득바득 우기고는 했다.


우뚝 멈춰 섰다. 어딘가 깊은 곳에 가둬둔 네 기억들이 하나 둘 비집고 나오는 것만 같았다. 청가람. 조심스럽게 네 이름을 불렀다. 정말로 네가 오기라도 할 것처럼. ,가람. 청가람. 청가람. 가람아. 단 한 번도 다정히 불러주지 않은 네 이름이 마냥 야속하기만 했다. 가람아, 가람아. 어디에 있을지도 모를 네 이름을 수도 없이.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울음이 차서 목이 갈라졌다. 그럼에도 나는 네 이름을 불렀다.



청가람.”

, 백건.”



다정한 목소리. 나는 거기에 훽 고개를 돌렸다. 너는 중학생 때와 다를 바 없는 조그마한 체구였다. 그래서 더 현실감이 없었다. 정말로 내가 꿈에서 수도 없이 그리던 네가 내 눈에만 보이는 걸까봐. 그래서 더 이상 너를 부르지도 못하고 넋을 놓은 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현실의 네가 맞으리라는 보장이 없었으니, 그게 더욱 무서웠다.



오랜만이야.”



야속한 네 미소가 번졌다. 너는 천천히 내게로 다가와 힘없이 떨궈진 내 손목을 부여잡았다. 네 손을 따라 천천히 팔이 올라갔다. 팔은 네 눈높이에서 멈추었고, 소매에 진 푸른 얼룩을 보고는, 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또 얼룩졌네.”



옛날의 너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래도 예뻐.”



예전처럼. 너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목 안쪽에 입을 맞췄다. 소매에 얼룩이 졌다. 우리는 그 얼룩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