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AU
둥굴레차!
백건X청가람
청춘예찬
14.10.24
백건이 정신을 못 차리는 일이야 흔한 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달랐다. 항상 미술실에 박혀있던 백건은 요 며칠째, 내내 3층의 남자화장실이 있는 복도에 기대어 서서 반대편 건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다가와 뭘 하고 있느냐 물어도 백건은 멍한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이 집중을 하면 주위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백건은 딱 그 모양이었는데, 백건의 관심이라도 끌려 말을 거는 이들이 그걸 알아챌 리가 없었다. 복도에 죽치고 앉은 지 꼬박 일주일이 되던 날. 은찬이 다가와 턱 백건의 손목을 잡았다.
“뭐 하고 있어?”
“…구경.”
“무슨 구경?”
백건이 짧게 턱짓으로 반대편 건물을 가리켰다. 백건의 시선이 닿는 곳은 반대편 건물의 도서실이었다. 하아? 어이가 없다는 듯 은찬이 백건을 노려보자, 곧 뭐, 하고 잔뜩 불만을 담은 대답이 들렸다. 백건은 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지금껏 제대로 읽어본 책이라고는 엄마가 자기 전에 읽어주던 전래동화 몇 편, 동화 몇 편이 전부였다. 책도 싫어했고 글씨가 많은 것도 싫어했다. 공부를 한답시고 책을 펴놓으면 채 오 분도 되지 않아 잠이 들고는 했다. 은찬은 그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더욱 이해를 하지 못했다.
“너 책 싫어하잖아.”
어어, 그렇지. 영혼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근데 도서실은 왜 보는데?”
어…, 그냥. 백건은 은찬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답했다. 그으래. 그렇게 말하며 은찬은 가만히 백건의 시선을 쫓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끝엔 사람 하나가 있었다. 얌전히 품에 책을 안은 팔, 헐렁해 보이는 자켓, 그리고…
“어, 쟤…”
“알아?”
그제야 은찬이 감을 잡은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 뭐야, 백건.
“알지, 쟤 전학생이잖아.”
“전학생?”
“한, 일주일 전에 전학왔댔나… 이름이……”
이름이? 제 말 끝을 따라하는 모습이 퍽이나 우스웠다. 백건은 몇 번 보지 못한 간절한 표정으로 은찬을 조르고 있었다.
“청가람이었을걸, 아마.”
흐음. 짧게 입을 다시는 백건을 바라보며, 은찬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왜, 관심 있어? 백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틀을 붙들고, 아주 오래오래 그 모습을 바라보다, 종이 쳐서야 느지막히 걸음을 옮겼다. 교실로 돌아가는 내내 은찬이 귀찮을 정도로 이것저것을 물어왔지만, 백건은 대답 한 번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청가람, 청가람, 청가람…이라. 아까 은찬에게 들었던 이름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아서, 백건은 가만히 입속으로 그 이름을 되뇌었다.
이젤 앞에 앉아, 백건은 오랜만에 넋을 놓았다. 원래라면 참 자연스럽게 붓을 움직였을 터였다. 탁한 색으로 범벅을 하고, 그 위에 금빛을 덧칠하고, 그리고 몇 번씩이나 똑같은 색을 입혔을 텐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가만히 입술을 깨물며 물감을 섞었다. 파레트 위에 섞여지는 물감은 언제나의 잿빛이 아니었다. 붉은 빛을 띠는 갈색. 치덕치덕 캔버스에 붓 칠을 하며, 백건은 영 정신을 붙잡지 못했다.
소문은 아주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것은 백건이 유명인사이기도 했고, 더욱이 5년이나 똑같은 것만 그려오던 백건이 다른 걸 그리기 시작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교문 앞에 매스컴이 잔뜩 진을 쳤다. 백건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플래시를 터뜨리고, 계속해서 녹음기를 눈앞에 들이밀었다. 뭘 그리는 겁니까, 5년 동안 본인을 그렸다면서 이제 와 방향을 바꾸는 이유가 뭡니까. 그저 단순한 호기심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끌어내리려는 시비에 가까운 것인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질문들. 백건은 짧게 욕짓거리를 뱉어내며 그 속을 빠져나갔다. 소매 끝에 붉은 물감이 묻어났다.
“너 쟤랑 친하냐?”
“누구?”
“쟤, 전학생.”
“가람이?”
얼씨구? 백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람이이?”
“아, 친구 하기로 했거든.”
그래, 니가 그렇지. 백건은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은찬이야 워낙에 붙임성도 좋고 사람도 좋아했으니, 친구가 많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은찬과 친구가 아니라는 쪽이 더욱 이상했다. 은찬은 남들에게 사랑받는 능력이 있었다. 저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모두가 은찬에게 호감을 가졌고 금세 가까워졌다. 그러니 아마 그 능력으로 전학생이랑도 친해진 거겠지.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뭘.”
삐죽 입이 나왔다. 친구가 많은 게 부럽다는 것이 아니었다. 썩 친하지도 않은 녀석들이랑 어울려봤자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백건에게 있어 친구란 은찬 딱 한 명 뿐 이었는데, 은찬을 찾는 이들은 갈수록 많아지기만 했다. 어렸을 적엔 외로울 때마다 은찬을 찾고는 했다. 주은찬, 주은찬, 하고 허공에 팔을 뻗고 은찬의 이름을 부르면 어디에선가 나타나 응, 백건. 하고 제 손을 잡아주고는 했다. 물론 은찬이 아무에게나 그런다는 것은 아니었다. 은찬은 친구가 많았지만 속을 깊게 나누는 친구는 드물었고, 선을 그어놓고 그 이상은 다가가지 않았다. 그랬음에도 속이 상하는 것을 감출 길은 없었다. 백건은 대놓고 그걸 드러냈다. 자존심이 상하느니 유치하다느니 그런 걸 따질 참이 아니었다. 넌 내 친구잖아. 답지 않게 백건이 친구라는 단어에 매달렸다. 그래, 난 니 친구야. 은찬이 환하게 웃으며 백건의 등을 쓸어내리자 얼른 손을 쳐냈다. 어린애 아니거든. 응, 알지, 어린애 아니지. 백건의 표정에 짜증이 잔뜩 서렸다. 그래서, 걘 뭐하는 애래? 그 분위기가 퍽이나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백건이 얼른 말을 돌렸다. 은찬이 곰곰이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고갤 가로저었다.
“몰라.”
“몰라아?”
“몰라. 말 안 해주던데.”
친구라며. 너랑은 다르지. 단호하게 나온 대답에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백건이 찡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그것만 알아. 삼주 전에 전학 왔다, 제 이름은 청가람이다.”
“…그으래.”
백건이 말꼬리를 흐렸다. 은찬과 헤어지고 난 후, 그 길로 곧장 미술실로 향했다. 은찬과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 얼굴을 눈에 새겨두었다. 새빨갛게 빛나는 눈, 세상의 고독이란 고독은 다 씹어 먹은 표정. 백건은 그걸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요 며칠 내내 백건은 제 얼굴이라고는 단 한 장도 그리지 않았다. 제 얼굴을 그리는 것조차 까먹은 것처럼 가람의 얼굴을 그려댔다. 그래, 그 때와 똑같았다. 제 누나인 백은을 그려대기 시작하던 때, 저를 그려대던 그 때. 백건은 지금 딱 그 상태였다.
미술실 한 켠에 쌓아놓은 캔버스 위는 백건의 얼굴이 아닌 가람의 얼굴로 가득했다. 그게 또 전교에 소문이 돌았다. 가람이 복도를 지나가면 하나 둘 몰려와 뒤에서 수군대기 시작했다. 쟤라며? 왜, 요즘 백건이 그린다는. 전학생이라던데. 그 소문은 점점 커져갔고, 급기야는 가람에게 대놓고 물어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쉬는 시간마다 가람에게 다가와 탁, 소리가 나게 책상을 치고는 재수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너, 백건이랑 친해? 그렇게 물으면 가람은 특유의 그 표독스런 눈으로 상대를 쏘아보며,
“백건이 누군데?”
라며 인상을 쓰고는 제 책상에 있는 손을 털어내었다. 그러니 더욱 소문이 커져갈 수밖에. 아이들도 차마 백건에게 대놓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 대신 수많은 질문세례는 은찬에게로 쏠렸다. 너 백건이랑 친하지? 로 시작해서, 걔 요즘 왜 전학생만 그린대? 라는 말까지, 은찬은 연신 모르쇠로 일관하며 답을 피했지만 사실 그게 맞았다. 은찬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백건이 가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알았지만 그림까지 그릴 줄은 몰랐다. 은찬은 당장 휴대전화를 들어 백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니가 어떻게 좀 해봐, 애들이 자꾸 나 귀찮게 한단 말이야. 그리고 곧 답이 도착했다. 어쩌라고. 짧고 재수가 없는, 백건과 쏙 빼닮은 그 답에 은찬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건아.”
집에 돌아와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백은이 다가와 백건의 팔을 붙들었다. 방금 막 촬영이라도 마치고 왔는지 눈가가 반짝거리며 빛을 냈다. 보기 드문 진한 노란 빛. 백은의 보랏빛 눈동자와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려서, 백건은 한참이나 그걸 바라봐야만 했다.
“화장품 씨에프 들어온 거야?”
“응? 어떻게 알았어?”
“눈.”
백건이 톡톡 눈두덩이를 두드리자 백은이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건은 유리컵에 가득 우유를 따랐다. 얘, 건아, 건아. 자꾸만 귀찮게 제 팔을 건드리자, 백건이 고개를 돌리며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아, 왜!”
“짜증내긴… 너, 말해봐.”
“뭘?”
백은은 다 알고 있다는 눈치였다. 갈색으로 물들인 눈썹이 예쁘게 움직였다. 저를 바라보던 보랏빛 눈동자가 휘고, 입가에 상냥한 미소가 떠올랐다. 누나는 다 알고 있단다. 마치 그렇게라도 말하듯이. 그거 있잖아, 그거. 무슨 내통이라도 하듯 백은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 뭔데? 애초에 백건이 그걸 알아주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백은은 입을 삐죽이며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던 잡지 하나를 가져왔다.
“이 기사 있잖아, 이거!”
특종, 이란 타이틀을 단 기사는 백건을 향한 것이었다. ……5년간 자신의 초상화만을 그리던 그가 다른 사람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소문을 듣고 그가 현재 재학 중인 고운 고등학교를 찾았다. …… 학생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X모양(18) A양(19) 미술 교사 Y씨(43) …… 그는 여전히 대답해주지 않았지만, 조만간 개인 작품전을 낼 것이라는……
“누나 이딴 걸 믿어?”
백건이 인상을 쓰며 손에 쥐고 있던 잡지를 던져버렸다. 툭 발치에 떨어진 잡지는 잔뜩 구겨진 채였다.
“그래도 몇 가지는 사실이잖니? 물론 개인 작품전은 완전히 거짓말이지만.”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백건은 더 이상 인상을 구기고 있을 수가 없었다. 으, 하고 지긋지긋한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됐어, 말 안 할 거야. 비워진 유리컵을 싱크대에 가져다 넣으며 백건이 못이라도 박듯 단단히 꼬집었다. 백은은 테이블에 기대어 가만히 멀어져가는 백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툭 말을 건넸다.
“네가 직접 그리기까지 하다니. 어떻게 생겼는지 말은 해줄 수 있잖아.”
우뚝 백건이 걸음을 멈췄다. 진짜 궁금해? 거듭되는 물음에 백은이 어여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리는 거라면 누나도 알잖아.”
백건의 입가에, 보기 드문 미소가 걸렸다.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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