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AU, 소꿉친구AU, 사망소재 주의
둥굴레차!
백건X청가람
죽은듯, 죽어버리듯
14.10.25
1.
더 이상 엄마를 볼 수 없대. 어린 너는 내 품에 안겨 그렇게 울어대고는 했다.
2.
네게는 언제나 빛이 난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건 분명했다. 네 손끝에서 별빛이 떨어지는 걸 몇 번이나 보았다. 너는 환하게 내 이름을 불렀고, 나는 내 이름을 불러주는 너를 퍽이나 좋아했다. 백건, 건아. 너는 다정스레 내 이름을 불렀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내 쪽으로 손을 뻗으며. 동경, 이라고 해야 하는 게 좋을까. 나도 그 웃는 얼굴을 조금이라도 닮을 수 있었으면 참 좋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 날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너는 더 이상 웃지 않았고, 내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았다. 너는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을 허공만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만 했다. 나는 너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참으로 힘이 들었다. 너의 곁에 앉아 암만 너의 어깨를 감싸 안고 너의 이름을 불러도 너는 여전히 내 쪽을 바라봐주지 않았다. 나는 다시 네가 내 이름을 부르기를 원했다. 네가 다시 내 이름을 불러주기를, 내게 손을 뻗어주기를, 그 환하고 어여쁜 미소를 다시 보여주기를. 나의 긴긴 노력을 비웃듯, 너는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너는 여전히 방구석에 처박혀 울음을 흘렸다. 나는 그 때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다. 얼굴을 묻은 다리에, 머리를 감싸 안은 팔에 수없이 많은 상처가 나 있었다는 걸, 나는 그걸 알아차려주지 못했다.
3.
건아, 더 이상 엄마를 볼 수가 없대. 꿈속의 너는 언제나 그렇게 말하며 내 품에 매달려 엉엉 울고는 했다. 어렸을 적의 모습 그대로였다. 고등학생이 된 나와, 다섯 살 적의 너. 너는 그 조그마한 팔로 내 다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떨구며 엉엉 울어대었다. 엄마를, 엄마를 볼 수 없대. 끅끅거리는 울음사이로 계속해서 너는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런 너를, 가만히 감싸주었다. 괜찮아. 듣기에도 괴로운 목소리로. 내가 옆에 있잖아. 너를 따라 울어버리며, 나는 그렇게 네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청가람. 꿈속의 너는, 그 말에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더랬다.
4.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건반이 눌리며 맑은 소리가 났다. 나는 가만히 몸을 돌렸다. 맨 뒷자리에 앉은 너는, 희미한 미소를 띠며 힘없이 박수를 쳤다.
“괜찮았어?”
살짝, 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만히 일어나 네 곁으로 다가갔다. 너는 조심스레 내 손끝을 쥐고는 꼭 두 손으로 감싸며 짧게 입을 맞추었다. 손끝에 닿는 입술의 감촉이 그저 간지럽기만 해서, 나는 조그마한 소리로 웃어버렸다.
“널 다시 보게 돼서 기뻐.”
응, 나도. 조그맣게 들려온 너의 대답에 나는 천천히 너의 목을 끌어안았다. 네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여린 너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나는 어렸을 적의 네 생각을 했다. 내가 이렇게 널 끌어안으면, 너 또한 익숙한 듯이 내 등을 쓸어내렸다. 나는 지독한 어리광쟁이였기에, 네가 내 등을 쓸어줘야만 직성이 풀리곤 했다. 너는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욱 다정스런 손으로 나를 품어주었다. 문득, 너의 손길이 그리웠다.
5.
너를 다시 만나게 된 건 열여덟 살의 여름이었다. 여름방학을 일주일 앞두던 날, 네가 전학을 왔다. 어릴 적과는 다르게 홀쭉해진 두 뺨, 소매가 짧은 셔츠 아래로 훤히 드러난 얇은 팔뚝, 새하얗게 질린 피부. 너는 이름도, 그 무엇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곧 너임을 알아차리고, 곧장 너의 이름을 불렀다.
청가람.
반의 시선이, 너와 내게로 쏠렸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나를 바라보는 그 수많은 시선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내 바닥에 시선을 주고 있던 네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추었다. 어릴 적엔 참으로 아름답다 생각하였던 그 붉은 눈동자가, 빛을 잃어 탁하게 변해있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너의 눈을 바라보았고, 네가 먼저 시선을 떨구었다. 나는, 숨을 쉬는 방법을 잊어버린 듯 제대로 숨을 삼키지도 못했다.
6.
가만히 손을 움직여 네 손등 위에 내 손을 겹쳤다. 차갑게 식어버린 너의 피부. 나는 네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끼며, 가만히 네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머리를 기댄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이따금 너는 정말로 죽어버린 것 같아서, 나는 그렇게라도 네가 살아있음을 느껴야 했다. 청가람. 나는 가만히 너의 이름을 불렀다. 청가람. 다시 한 번 너의 이름을 거듭해 불러서야, 네가 대답했다. 응, 백건. 뚝뚝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가는 네 목소리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너는 죽은 듯 살았다. 웃지도 않았고, 먹지도 않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았다. 그런 네가 손뼉을 치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때는, 내가 피아노를 쳐줄 때뿐이었다. 피아노는 중학교 때에 그만둬버렸지만, 나는 너를 위해 다시 건반에 손을 올렸다. 오로지 너 때문이었다. 네가 애써나마 웃어주었기 때문에. 힘없는 손으로 짝짝, 박수소리를 내며 나를 바라봐주었기 때문에.
7.
죽어버린 너의 어머니는 피아노를 치던 사람이었다. 장래가 유망한 피아니스트였고, 너를 낳은 후에는 동네의 피아노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너의 이름을 부르며 피아노 학원엘 가면, 너는 어머니의 곁에 껌딱지처럼 들러붙어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엄마, 하고 애교스런 목소리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너는 어머니의 손을 참 좋아했다. 그 손이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것도 좋아했다. 손을 타고 흐르는 그 전율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내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그 때쯤이었다. 나는 너의 관심을 사고 싶었고, 조금이라도 오래 너와 함께 있고 싶었다. 비록 너는 피아노에는 영 소질이 없어보였지만, 그래도 내가 언제나 너의 곁에 있을 것이었으니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8.
피아노를 그만 둔 것은 열여섯 살이 되던 해였다. 너와 헤어진 지 꼬박 삼 년이 되던 날. 나는 피아노의 앞에 앉아, 검은색과 흰색이 수도 없이 놓인 그 건반을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너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울고, 울고, 또 울다가 아무리 노력해봐야 다시는 너를 만날 수 없다는 잔인한 현실을 깨달아버렸다. 아비가 애를 버리고 떠나버렸다지. 친척 네 집을 전전한다더라고. 우리 건이한테는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피아노는 그저 구실에 불과했다. 조금이라도 오래 너의 곁에 있기 위해, 너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너를 만날 수 없다는 그 말을 들었고, 나는 그날로 피아노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적어도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네가 전학을 오고 나는 다시 건반에 손을 올렸다. 오로지 너를 위한 일이었다. 너는 그저 숨만 쉬는 것 같았다. 그런 네게 빛을 되찾아 줄 것은 오직 피아노 소리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내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너는 내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주었고, 나는 너를 위해 매일매일 피아노를 연주했다.
9.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다. 사람들은 죄다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새하얀 국화가 덩어리를 진 끔찍한 광경이 보였다. 아, 나, 이 장면 어디에선가 봤어. 그 어릴 적, 너의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나는 지금과 똑같은 풍경을 보았다. 그 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점, 네가 앉아있던 그 자리에, 그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가만히 걸음을 옮겼다. 하이얀 국화꽃들에 묻혀, 검은 테를 두른 액자 속에서, 네가 웃고 있었다. 어릴 적의 그 사진이었다. 너와 내가 다섯 살이던 시절, 너의 어머니가 죽지 않았던 시절, 네가 진정으로 살아있던, 그 때.
10.
너는 죽어버렸다. 방 한 구석에서 목을 매달아 죽어버렸다고 했다. 끊어진 줄을 목에 매달고, 그 새빨간 혓바닥을 내놓은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그렇게 죽어있었다고 말했다. 너는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았다. 책장에 수두룩하게 꽂혀있던 다이어리는 온통 백지였다. 네가 사다 모은 책들은 손때조차 타지 않고 처음 사온 그 상태 그대로였다. 네 방안에서 유일하게 네 흔적이 담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너의 사진이 잔뜩 담긴 앨범, 그 뿐이었다. 한 살, 두 살, 다섯 살. 그 앨범은 고작 그 5년간의 기록을 담고 있었지만,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그 앨범을 펼쳐보았는지, 한 장, 한 장마다 손자국이 남은 사진들이 잔뜩이었다. 너는 무슨 표정으로 그 사진을 쓸었을까. 어떤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앨범을 펼쳤던 걸까. 어머니의 품에 안겨 환하게 웃고 있는 너의 얼굴을 보면서, 너와 함께 네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는 내 얼굴을 보면서,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구역질을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그만 그 방을 빠져나왔다. 훗날 네 친척에게서 네가 남긴 단 하나의 흔적을 전해들을 수가 있었다. 너와 내가 함께 찍은 그 사진의 뒷면에, 볼펜으로 휘갈겨 쓴 그 짧은 말 한마디가 너의 마지막 흔적이자, 유언이었다.
피아노 따위, 영영 듣지 못하게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마치 나에게 하는 말이 것 같아, 나는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다.
11.
불에 타버린 너는 땅 속 깊은 곳에 묻혔다. 나는, 다시는 너를 볼 수 없게 되었다.
12.
훗날 너의 친척 하나가 내게 다가와 그렇게 말해주었다. 내가 너를 떠나고 난 뒤, 네가 네 아버지에게 매일 같은 맞았던 그 지옥 같은 나날의 흔적들을. 밤마다 앨범을 끌어안고 소릴 죽여 울던 너의 밤을. 죽은 듯 쓰러져 숨만 쉬던 너의 그런 안쓰러운 모습들을. 나는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는 너를 얼마나 아프게 했던 걸까.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하던 피아노를 치던 내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네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네게 미안해서,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13.
더 이상 엄마를 볼 수 없대. 또다시 꿈속의 네가 나타났다. 너는 잔뜩 울상이 되어버린 얼굴로 내 손을 붙들었다. 건아, 더 이상 엄마를 볼 수 없으면, 난 어떻게 해야 돼? 어떤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너의 곁에 내가 있다는 말은, 더 이상 해줄 수 없었다. 너를 죽게 만든 장본인은 나였으니까. 괜찮아. 그 쉬운 말조차 나오지가 않아서, 나는 목뒤로 울음을 삼키며 그저 너를 끌어안기만 했다.
“미안해.”
너를 끌어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나는 그렇게 울었다.
“미안해, 청가람.”
더 이상 엄마를 볼 수 없대, 건아. 너는 고장난 것처럼 그 말만을 반복했다. 응, 볼 수 없어. 너의 조그마한 뒤통수를 감쌌다. 어깨에 네 얼굴이 파묻혔다. 나도 이제, 너를 만날 수가 없어. 끅끅거리는 울음사이로 너를 향한 죄책감이 새어나왔다.
“너를 죽여버려서 미안해.”
14.
피아노는 그만 둘 거에요, 더 이상 칠 자신이 없어요. 미안해요 선생님. 나를 내려다보는 그에게 속사포처럼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냈다. 백건, 건아. 거듭 나를 붙잡으며 그가 물어왔다.
“왜, 그만두는 거니.”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말에, 문득 네 생각이 나서 그만 울어버릴 것 같았다.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만 둘래요, 선생님. 어색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짚는 그의 손을 떼내었다. 건반은 더 이상 눌리지 않았다. 아니, 그 건반을 누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국화꽃에 파묻혀있던 네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때의 너는, 환하게 웃고 있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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