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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AU

둥굴레차!

백건X청가람

청춘예찬

14.10.25







한적한 오후였다.


학교 도서실치고는, 퍽이나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널따란 공간에 수십 명은 들어올 법한 크기인데도 언제나 그곳엔 서너 명의 학생밖에 없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몸에 딱 붙인 팔에 두꺼운 책이 두 권, 세 권이 쌓여갔다. 적당히 햇살이 비치고, 적당히 그늘이 지는 자리였다. 도서실의 맨 끝, 철학책이 줄지어 늘어선 그 구역엔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가만히 의자를 끌었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가람은 인상을 찌푸렸다. 고운고에 전학을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가람은 친구 하나 만들지 않고, 내내 도서실에 틀어박혔다.


가만히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집중을 하기 위해 귀에 꽂은 이어폰에선 빗소리가 흘러나왔다. 턱을 괴고, 한 손으로 책장을 넘겼다.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내내 손가락 끝에 걸리던 햇볕이 점점 자리를 잃어가고, 완전히 그늘이 졌을 때, 가람은 책을 덮었다. 오후 일곱 시. 언제나의 그 시간.


안녕히 계세요,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사서 선생에게 짧게 인사하며 가람이 학교를 빠져나갔다. 새로 전학을 와서 좋은 점이라고는글쎄. 전에 있던 학교보다 도서실이 크다는 점? 그것뿐이었다. 전에 있던 학교는 도서실이라고는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작고,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사정이 생겨 아버지가 전근을 가게 됐었다. 기어이 엄마와 함께 가고 싶다고 말했고, 엄마는 한참이나 가람이의 눈치를 보다 결국 이사를 가기로 했다. 아빠 맞아? 저를 무슨 방해꾼쯤으로 여기는 그 눈을 바라보며, 가람은 입 속으로 그런 말을 삼켰다. 집에는 일찍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들어가 봐야 반겨줄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가 아는 체를 하고는 했지만, 아버지는 그녀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다 늙어서 저게 무슨. 언제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내심 부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단 한 번도, 아버지는 가람에게 그렇게 다정스레 대해준 적이 없었으니까.





 

가람은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도서실에 박혀 책을 읽었다. 귀찮게 말을 거는 사람도 없었고, 무엇보다 참 조용했다. 그런데 오늘, 그 조용함이 깨져버렸다. 톡톡, 책을 읽는데, 책상 위를 두드리는 긴 손가락이 보였다. 손가락에 얼룩덜룩한 자국이 남은 걸 보니 분명 멀쩡한 놈은 아닐 테고. 그렇게 올려다본 곳에는 학교의 유명인사가 있었다.



나 누군지 알아?”



다짜고짜 그렇게 물어오는 게 참으로 어이가 없어서, 가람은 픽 웃음을 흘렸다. 자신만만한 얼굴이 괜스레 놀려주고 싶게 생겼다. 분명 모든 사람한테 떠받들어지며 살았을 것이다. 요즈음 저를 괴롭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고그래서 일부러 인상을 쓰며 입을 다물었다. 너 때문에 내 시간이 엉망이 되어버렸다는 듯.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을 한 건지, 상대는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난 백건이라고 하는데



내민 손이 민망하게, 가람은 책상에 놓인 책을 끌어안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백건이 허공에 뜬 제 손을 바라보다, 얼른 가람의 뒤를 쫓았다.

 





매일같이 백건은 지겹게 가람에게 말을 걸어댔다. 쉬는 시간마다 가람이 있는 교실을 찾아 한참이나 보고 간다던지 같은 반 애들에게 가람에 대해 이것저것을 묻고 간다던지덕분에 가람은 원치 않게 백건을 등에 업고 유명해지고야 말았다. 복도를 지나든, 화장실엘 들어가든, 매점엘 가든 백건이 쟤를 그렇게 쫓아다닌다며, 하는 위험한 소문이 뒤따랐고, 거기에 도장이라도 찍듯 그때마다 백건이 다가와 가람의 어깨를 붙들어 댔다.


가람은 백건이 그저 귀찮기만 했다. 사람과의 관계고 뭐고 애초에 가람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분야였다. 혼자 있더라도 외로운 줄을 몰랐고, 딱히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워낙에 어려서부터 혼자 자랐으니 어쩌면 가람에게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지도 몰랐다. 아버지란 사람은 언제나 가람을 혼자 내버려두었고,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도장엘 가도 가람의 또래는 없었다. 가람은 언제나 구석에서 저들끼리 대련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집에 있던 봉제 인형 두어 개를 가져와 품에 안고서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외로움을 몰랐으니 필요성도 모르는 것이다.





 

방과 후, 도서실에 앉은 가람의 맞은편엔 백건이 앉아 있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참 말도 안 되고 어울리지도 않는 일이었지만, 꾸준히 그러다보니 나 도서실에도 꽤 어울리지 않냐, 라는 말에 은찬도 고개를 끄덕이며 응, 그런 것 같아, 하고 영혼 없는 대답을 건네기도 했다. 가람은 매일 책을 읽었다. 저자의 이름도 어려운 철학 책을 읽기도 했고, 몇 번인가 들어본 것 같았던 인문소설을 읽는 날도 있었다. 가람은 별로 종류를 따지지 않았다. 제 기분에 따라 책을 고르는 것 같았다. 어느 날엔 인문, 어느 날엔 철학, 어느 날엔 역사. 백건은 그런 가람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가람의 품에 잔뜩 안긴 책 몇 권을 나누어 들어주거나, 높은 데에 꽂혀있는 책을 대신 건네주거나를 했다. 그때마다 번번이 고맙다는 말을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잊을만하면 한 번 씩 여기, 하는 백건의 말에 어, 하고 대답하거나, 고마워, 하고 조그마한 소리로 대답하는 걸 들었기에 더더욱 포기할 수가 없었다.


책장이 햇볕으로 얼룩진 것이 보였다. 가람은 턱을 괴고 앉아, 제 맞은편에 있는 백건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책을 읽었다. 백건은 때때로 이런저런 것을 물어왔다.



전엔 어디에서 살았어?”

여기서 얼마 안 멀어.”

어딘데?”

……



가람이 입을 꾹 다물었다. 더 이상 대답하기 싫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그저 책을 읽는 도중 다른 데에 신경을 쓰는 것이 싫었을 뿐이었다. 물론 백건은 그걸 알 리가 없으니 잔뜩 풀이 죽어 가람을 따라 입을 다물었지만. 가람의 옆엔, 300페이지는 거뜬히 넘어 보이는 책 서너 권이 있었다. 백건은 그걸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거 다 읽어야 집에 갈 수 있는 거야?”

아니.”

그럼?”

나머지는 다음에 읽어.”



지금 읽고 있는 거, 다 읽으면 일곱시겠다. 백건이 가람이 읽고 있는 책을 가리켰다. 50페이지 남았네. 백건은 요 며칠 새에 가람의 행동패턴을 다 파악했다. 여덟시쯤 느즈막히 등교를 하고, 일교시엔 내내 퍼질러 자다가, 2교시부터 눈을 떠 수업을 들었다. 쉬는 시간엔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거나 아니면 책상 서랍에 있는 책을 꺼내 읽었고, 혼자 점심을 먹고 교실로 들어가 잠을 잤다. 4교시엔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졸아대다 다시 5교시부터 정신을 차리고, 학교가 끝나면 곧장 도서실로 와 책을 펼쳤다. 가람의 일상은, 잘 짜여진 시간표처럼 매일이 똑같았다. . 가람이 책을 덮는 소리가 들렸다. 다 읽었어? 백건이 묻자, 가람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백건은 가람을 따라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 넣고는 묵묵히 걷는 가람의 뒤에서 두어 걸음을 떨어져 걸었다.


백건은 애초에 그렇게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말하는 사람이 주은찬과 가족 뿐 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오래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기자들의 물음에도 묵묵부답, 건아, 넌 너무 멋있어. 건아, 내 그림 좀 그려주면 안될까. 저를 붙들고 늘어지는 아이들의 말에도 묵묵부답. 그래서인지 본인조차 지금의 제 모습이 퍽이나 우스웠다. 나 원래 이렇게 내가 먼저 말거는 편이 아닌데, 라고 운을 떼면, 가람은 무슨 말을 할까.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서? 라고 말하며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어 올 것이 뻔했다. 백건은 빤히 가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요 며칠 새에 이미 익숙해진 듯, 가람은 그걸 신경도 쓰지 않았다.





둘은 매일 그렇게 방과 후에 도서실에 남았다. 백건은 책을 읽지도 않았고, 노트를 펴놓고 거기에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다. 그저 맞은편에 가만히 앉아, 턱을 괴고, 책장을 넘기는 가람의 새하얀 손가락이나, 언제나 발간 색을 띤 뺨이나, 저는 모르는 버릇인지 집중할 때에 새초롬하게 튀어나오는 입술이나 그런 걸 눈에 새겼다. 그러다 힐끗 가람이 저를 쳐다보며 뭐해, 라고 물으면 그냥, 이라며 씩 옅은 미소를 띠었다. 백건은 더 이상 미술실에 틀어박혀 있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간히 들었으나, 가람의 얼굴을 눈에 새기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짧았다.





 

너 요즘 가람이랑 붙어 다닌다며. 어엉? , 아니지. 네가 쫓아다니는 거구나. 백건은 문득 은찬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그랬던가. 그러고 보니 그러기는 했다. 가람은 백건이 썩 귀찮은지 대화를 오래 이어가지도 않았고, 옆에 있다고 해도 혼자 있는 듯 행동했다. 잠깐 한눈을 팔고 있으면 어느새 저 멀리에 가 있다든지, 가람이 책을 읽는 걸 바라보다 깜빡 졸았는데 쪽지 한 장 남기지 않고, 깨워주지도 않은 채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든지백건은 그게 썩 서운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언제나처럼 가람이 책을 읽는 걸 바라보다, 가만히 입을 떼었다.



그거 재밌어?”

별로.”

그럼 왜 읽어?”

글쎄.”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대답. 하지만 언제나 익히 들어왔던 것이니, 백건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막 책 읽는 애들 중에 작가도 가려서 읽는 애들이 있잖아.”



끄덕. 가람이 입을 다문 채 고갤 끄덕였다.



너도 그래?”



팔랑. 책장이 넘어갔다. 가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백건은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서운함을 감추며 다시 턱을 괴었다. 열댓 장이 넘어갔을 때였나. 두서없이 툭, 가람이 말을 뱉었다.



딱히, 없는 것 같은데.”

뭐가?”

니가 아까 물어봤잖아.”



내내 책장에만 시선을 두던 새빨간 눈동자가 백건과 시선을 맞추었다. , 아까. 백건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야, 내내 생각하고 있었어?”



다시 가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 건 한 순간이지만, 백건은 아마 며칠이 가도록 그 눈을 잊지 못할 거였다. 가람이 다시 책을 읽었다. 막힘없이 책장이 넘어갔다. 백건도 끈질기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난 그렇게 두꺼운 건 못 읽겠던데.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넌 진짜 책 좋아하나봐.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그렇게 매일 책만 읽는데, 안 지겨워? 책장을 넘기는 손도 멈추지 않았다. 가람은 입을 열지 않았다. , 손이 예쁘다. 책장을 넘기던 손이 일순 멈칫했다 다시 움직였다. 가람의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백건은 그걸 보았지만 일부러 모른 체를 했다. , 이나 아니, 라고 대답 한 번 해줄 때까지 멈추지 않을 셈이었다. 전에 있던 학교는 어땠어? 마치 혼잣말처럼, 백건은 이런저런 물음을 쏟아냈고,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백건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백건이 가만히 책장 위에 손을 얹었다. 가람이 냉정하게 손을 내칠 때였다. 손등에 닿은 그 하얀 손을 붙들었다. 뭐하자는가람이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백건의 표정은, 지금껏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물론 다른 아이들 앞에서야 언제나 그랬다지만 가람의 앞에선 언제나 조잘조잘거리고 행동 하나, 말 하나에도 희미한 미소를 띠어주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꾹 다문 입술,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금빛 눈동자. 그 진지한 얼굴로, 백건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청가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왜 평소와 다르게 그렇게 깊이 잠겼던지.



난 널 그려보고 싶어.”



손목을 붙든 그 자리가 타버릴 듯이 뜨거웠다. 가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그 속까지 꿰뚫듯 흔들리지도 않았다. 언제나 시덥잖은 말만 뱉어내던 입이었다.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 모습에 괴리감이 느껴져서, 가람은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 말의 의미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엉망이 되어서, 잠깐의 공백을 두고, 가람이 냅다 제 손을 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끌리는 의자 소리가 적막이 가득하던 도서실을 시끄럽게 울렸다. , ……! 가람이 무어라 말을 하려 하는 것 같았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백건이 저 말을 하는 의미조차 파악하지 못했으니 당연한 거였다. 가람이 뱉어낸 말이라고는 고작,



미친 거 아냐?”



하는 말 뿐이었다. 가람은 바닥에 내려두었던 가방을 걸쳐 메고 빠르게 도서실을 빠져나갔다. 백건은 가만히 앉아, 가람의 손목을 내내 쥐고 있던 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뜨거운 그 온기가, 영영 가시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내가 진짜 미쳤나보지. 조그맣게 속삭이며, 제 입술에 손바닥을 가져다대었다. 역시 아직 그 온기가 남아있어서, 백건은 쉬이 입술에서 손바닥을 떼지 못했다. 손바닥에선 가람의 냄새가 났다. 언제나 은은하게 풍겨오던 향. 따로 향수니 하는 걸 쓰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으니, 이것은 가람의 살 냄새가 분명했다. 그 향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아니, 질식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난 널 그리고 싶어. 창피함도 모르고 뱉어냈던 그 말은, 오롯한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