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AU
둥굴레차!
백건X청가람
청춘예찬
14.10.26
난 널 그리고 싶어.
금빛 눈동자가 저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렇게 말하던 날, 그 큰 손으로 제 손목을 쥐며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이던 그 날. 그 날을 기점으로 가람은 백건을 노골적으로 피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 복도에서부터 다가오는 걸 보면 얼른 등을 돌려 도망쳤다. 몰래 곁에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왁! 하고 놀래킬 때엔 저도 모르게 그 얼굴에 주먹을 꽂으며 냅다 소릴 질렀다. 누구한테 알아낸 건지 내내 시계 대용으로만 쓰던 휴대전화로 수십 개의 메시지가 오고, 계속해서 전화가 울렸다. 미저리 같은 새끼. 전화가 연달아 열댓 통이나 오는 걸 보며, 가람이 짧게 욕짓거리를 뱉었다. 휴대전화의 배터리를 분리하고, 주머니에 대충 전원이 나간 휴대전화를 꽂아 넣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피할 일은 아니었다. 친구끼리 걱정 하는 거야 뭐, 워낙 당연한 일이니, 하고. 한껏 콧대를 높이며 어깨를 으쓱하던 가람이 자리에 멈춰 섰다. 친구우? 오도카니 제자리에 서서, 가람은 멍하니 제 뒤를 돌아보았다. 길게 난 길엔, 저와 똑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이 쪽으로 오고 있는 게 보였다. 가람은 그 속에 오로지 혼자였다. 왜인지 울음이 나올 것 같아서, 더 이상 그 쪽을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얼른 고개를 가로저으며 집으로 향했다. 집이나 길거리나, 둘 다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머, 가람아. 오늘은 일찍 왔네?”
화분에 물이라도 주고 있었던 듯, 한 손에 물뿌리개를 든 여자가 가람을 반겼다. 응, 다녀왔어요. 가람은 짧게 대답하며 폭 여자의 품에 안겼다. 아빠는요? 가만히 저를 올려다보며 묻는 말에, 여자가 환하게 웃었다.
“뭐라더라. 오늘 부산엘 출장을 가게 돼서 못 온다고 했어. 가람이 오늘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환한 웃음에, 가람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먹고 왔어요. 그래? 여자의 얼굴이 알게 모르게 환해졌다. 저 들어갈게요. 내내 저를 품에 안던 여자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가람이 어색하게 웃었다.
가방도 벗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시간을 확인하려 켠 휴대전화는 전원이 나가있는 채였다. 아, 백건 때문에 꺼놨었지. 가람은 힘없이 축 늘어진 손을 뻗어 배터리를 끼웠다. 전원이 켜지기가 무섭게, 연달아 진동이 울렸다. 진동은 쉬이 멎지를 않았다. 이 미친놈은 대체 메시지를 몇 개나 보내는 거야… 투덜거리며 메시지 함을 확인했다. 수신메시지라는 글자 옆에‘N'이라고 반짝거리며 빛나는 곁에는 72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떠올랐다. 가람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미쳤다 미쳤다 하기는 했지만, 이정도면 진짜 미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어서 가람은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 전화가 울렸다. 010-XXXX-XXXX 이름도 저장되어 있지 않은 걸 보니, 최근 기록에 수도 없이 떠있는 그 목록과 똑같은 번호인 걸 보니 백건의 번호임이 분명했다. 가람은 거절버튼을 꾹 눌렀다.
계속해서 휴대전화에선 진동이 울렸다. 십 분이 지나고 삼십 분이 지나도 여전했다. 끝끝내 그게 짜증이 나고 참을 수가 없어서, 가람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아, 받았…
“너 뭔데?”
곧장 날카로운 질문이 날아들었다. 전화 너머로 백건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이었다. 가람은 짜증스런 손으로 제 머리를 헝클어놓더니, 쿵 침대를 내리쳤다.
“한 두 번 안 받으면 작작해야지. 너 뭐냐고.”
고운 말이 나갈 리가 없었다. 애초에 성격이 더러운데 그걸 건드려놨으니. 백건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가람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너 도대체 뭐야.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 귀찮게 하질 않나, 내내 옆에 붙어서 짜증스럽게 굴더니… 그만한 눈치도 없어? 내 번호는 또 어떻게 알았는데?”
-…
“대답해, 백건. 너, 나한테 왜 그러는지.”
사실은, 조금 친구라고 생각했었는지도 몰랐다. 살면서 단 한번이라도 친구라 부를 수 있을만한 누군가가 있던 적이 있었던가. 애초에 가람이 사람에게 마음을 쉽게 여는 타입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딱히 친구가 필요하다느니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혼자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많았다. 소풍을 가더라도, 학교에 있더라도, 그 무엇을 해도 혼자인 것이 훨씬 편했다. 굳이 옆에서 귀찮게 구는 누군가도 없었고, 비위를 맞추려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가람은 언제나 혼자였다. 먼저 다가오는 사람이야 많았지만 가람은 언제나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어오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했다. 나랑 친구할래? 열두 살, 반장이었던가. 안경을 쓰고 꽤나 똘똘하게 생겼던 아이였는데, 가람은 그걸 거절했다. 넌 너무 사람을 귀찮게 해. 그게 대답이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그랬다. 넌 어떤 점이 맘에 안 들어, 넌 그래서 날 가만히 못 두잖아. 별 시덥잖은 이유를 대며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막았더니 더 이상은 그 누구도 가람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가람은 완벽한 외톨이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외로운 것을 몰랐다.
그런데 처음으로 백건이 그 경계를 허물어댔다. 난 니가 귀찮게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밀어냈지만, 백건은 계속해서 가람에게 말을 걸고, 가람을 붙들고 웃어주었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그 경계라는 것은 이미 허물어져있을지도 몰랐다. 가람은 딱히 입 밖으로 다가오지 말라는 말이라던가 싫은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고, 묵묵히 제자리에 서서 저 멀리에 선 백건이 제 바로 옆으로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참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몇 년 동안이나 혼자서 모든 걸 잘 해왔는데, 이제 와서 외로움을 느낀다면… 너무나도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전파 너머로 푹 잠겨버린 텁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넌 왜 그러는데?
가만히 물어오는 그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 때의 그 날처럼, 제 손목을 붙들고, 얼굴을 가까이 붙이곤, 그 샛노란 눈으로 가람을 빤히 바라보며 묻는 것만 같아서, 저도 모르게 확 얼굴이 붉어졌다.
“난……”
가람이 다시 입술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가? 아니면……
“…씨발, 내가 널…!”
뚝. 전화가 끊겼다. 백건의 쪽에서 끊었을 리는 없으니 저도 모르게 종료버튼을 누른 것이다. 가람은 00:05:14 액정에서 몇 번이나 깜빡이다 사라지는 그 메시지를 바라보다, 다시 배터리를 빼버렸다. 아마, 다시는 연락이 오는 일도 없을 것이다. 또다시 밀어내고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가람은 가만히 이불을 그러쥔 손에 힘을 주었다. 꾹 다문 입술 사이로, 울음이라도 새어나올 것 같은 불쾌한 기분이었다.
그 다음 날부터 백건은 가람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며칠째 복도에서 마주쳐도 가람이 뒤를 돌아 도망가려고 하면 백건이 먼저 모습을 감췄다. 백건이 가람을 부르지 않자, 가람에게 쏟아지던 전교생들의 관심도 차츰 수그러들어갔다. 쉬는 시간마다 제 모습을 살피러 오고, 반 아이들에게 제 이야기를 캐묻고, 복도고 화장실이고 매점이고 도서실이고 졸졸 쫓아다니던 백건은, 더 이상 가람의 뒤를 쫓지 않았다. 아주 오랜만에 가람은 도서실을 들렀다. 여전히 사람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조용한 공간이었다. 요즘 통 안보이더니. 카운터에 앉은 사서 선생이 반가운 듯 물었다. 아, 일이 좀 있어서…. 가람은 멋쩍게 대답했다. 사실은,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못할 줄 알았다. 고운 고등학교에 전학을 와 처음으로 찾은 제 공간. 졸업할 때까지 영영 백건에게 시달려 이곳에 오지 못할 줄 알았는데.
얇은 팔 위로 두꺼운 책이 쌓였다. 맨 윗 칸에 놓인 책을 꺼낼 수가 없어서, 가람은 저도 모르게 백건, 하고 그 이름을 불렀다. 툭. 반쯤 뽑힌 책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높이에서 떨어진 책은 펼쳐진 채로 발치를 굴러다녔다. 가람은, 그만 소리를 내어 울어버릴 뻔했다. 책을 줍는 체하며 천천히 주저앉아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왜, 너의 이름을 부르려고 한 걸까. 가람이 짧게 울음을 토해냈다. 우윽, 하고 짓이긴 입술 사이로 서러운 그 무언가가 새어나왔다. 주섬주섬 떨어진 책을 줍고, 언제나의 그 자리로 가만히 걸음을 옮겼다.
적당히 햇볕이 드는 책상, 적당히 그늘을 등진 의자. 책상 위에 곱게 놓인 공책 하나가 보였다. 크로키 북. 날쌘 글씨로 대충 휘갈겨 쓴 것이었다. 갈색의 표지 위엔 오직 그 글자 하나만이 적혀 있어서, 가람은 품에 안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척 보기에도 두꺼워 보이는 그 노트의 안쪽엔 잔뜩 가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가람은 멍하니 책장을 넘기기만 했다. 책 한 권이 온통 가람의 얼굴로 가득 차 있었다. 한 장, 두 장, 열 댓 장. 암만 책장을 넘겨도 그곳엔 가람의 얼굴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손을 움직여 노트를 덮자, 뒷면에 작고 노란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있었다.
내 이름 불러봐.
왈칵. 가람은 입술을 깨물었다. 백,건. 뚝뚝 토막이 나는 말. 가람은 스르륵 주저앉았다. 여전히 책상을 짚은 팔이, 유난히 아파오는 것 같았다.
“…백…건.”
가람은 수도 없이 백건의 이름을 불렀다. 여지껏 입속으로만 부르던 그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서, 얼른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손을 짚은 책상 아래로, 긴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그 그림자는 가람의 앞에서 우뚝 멈추어서, 가만히 몸을 숙였다. 책상 아래로 진 그늘 안에서도, 그 샛노란 눈동자가 똑똑히 보였다.
“…백건.”
“나 계속 피할 거야?”
읏, 가람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궜다. 미안해 죽을 것 같다는 말이, 이럴 때에 쓰는 말이던가. 어느 샌가 제 곁으로 다가온 백건이 조심스레 가람의 어깨를 쥐었다.
“니가 날 싫어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피해 다닌 거야.”
“…으읏…”
“근데 이렇게 울기까지 하는 걸 보니까, 퍽이나 그리웠나보네.”
“……시끄…러워…”
어깨에 올린 손을 떼어내며, 가람이 짧게 중얼거렸다.
“나랑 친구하자.”
“……”
“이건 약속까지 받아낼 거야. 그러니까 대답해, 청가람.”
그 날의 목소리와, 참 많이 닮았어서, 가람은 제 뺨을 잡은 백건의 눈을 피했다. 백건이 다시금 물어왔다. 단어 하나하나,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듯 한 목소리에, 가람이 질끈 눈을 감았다.
“나 다시 니 앞에 나타나도 돼?”
끄덕. 가람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울음을 흘렸다. 미안해. 차마 사과는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로, 가람은 백건의 어깨를 붙들고 그 가슴팍에 머릴 박고서 아주 오랜만에, 소리를 내어 울었다.
“…너 주은찬 알아?”
“주은찬?”
“걔는 너랑 친구라던데.”
책장을 넘기며, 가람은 한참이나 입술을 짓이겼다.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자신없는 가람의 말에 백건이 픽 웃음을 흘렸다. 저랑 친구하자던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넸던 그 날, 백건은 결국 가람과 새끼손가락까지 걸었다. 각서도 쓸까? 하는 말에 질색을 하던 것은 가람이었고, 백건은 다시 가람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뭐야, 쟤네 안 친한 거 아니었어?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백건도, 가람도 애초에 그런 걸 신경 쓸 성격이 아니었기에 흘깃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백건은 언제나처럼 가람의 맞은편에 앉았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가람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데에 있는 책을 꺼내주었고, 오후 일곱 시가 되면 두어 권을 집어가 제자리를 찾아 넣었고, 두어 걸음을 떨어져 가람의 뒤를 쫓았다.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야?”
백건의 물음에,
“딱히 없는데.”
하는 심심한 대답. 이에 그치지 않고,
“진짜?”
라고 묻는 말에, 가람이 슬쩍 인상을 썼다.
“너 어차피 말해도 기억도 못할 거면서……”
가람이 작게 중얼거리며 책 한권을 백건의 앞에 놓았다. 그 하얀 손가락이 저자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작가는 문체가 담담해. 글을 쓸 때 딱 자기가 보여줄 만큼만 보여주고 나머지는 독자들한테 맡기지.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기가 유명해. 누구는 극찬을 하고, 누구는 아주 질색을 하고…. 본인이야 자기만 만족하면 된다고 말한 인터뷰가 되게 유명한데, 그걸 가지고 불친절하네 마네, 독자와 이야기하기는커녕 제 할 말만 한다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꽤 많고, 하여튼 비평가들이나 독자들 사이에서나 팬층이 확실한 사람이고… 야, 듣고 있어?”
내내 조잘조잘 떠들던 가람이 백건을 쏘아보았다. 백건은 턱을 괸 채 멍청한 얼굴로 가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았다. 가람의 미간이 좁아졌다.
“너, 사람이 설명을 하면 좀 들어야 될 거…”
“예쁘다.”
뭐? 가람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백건은 제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 지나 알고는 있는 걸까. 쿵. 책상을 내려친 조그마한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 지금 뭐라고…
“아니, 예뻐서.”
진짜야, 정말로. 자기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울리지 않는 마냥 순진무구한 그 얼굴로 손까지 내젓는 백건을 바라보다, 가람이 확 얼굴을 붉혔다.
“…진짜…이 미친새끼……너 진짜 짜증나.”
가람이 가방을 둘러메며 백건의 눈앞에 가운데 손가락을 흔들었다. 너, 따라 오기만 해. 죽여 버릴 거야. 씨알도 안 먹히는 협박 같지도 않은 협박에, 백건이 어깨를 으쓱하며 가람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얇은 유리창 너머로, 먹구름이 밀려왔다.
가람아, 오늘 비 온댔는데… 괜찮아요, 금방 올게요. 가람아, 그래도… 다녀오겠습니다. 왜 그 말을 그냥 넘겼던 건지. 가람은 비에 푹 절어버린 제 모습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꾸역꾸역 손에 우산까지 쥐어줄 때 그냥 가지고 나올 걸… 뭣 하러 그걸 싫다고 해서는. 후회가 거듭됐다. 말이라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 댔던가. 아, 말이 조금 다른가. 하여튼. 가람은 이미 젖을 대로 젖어버린 교복에 인상을 찌푸렸다.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도 잔뜩 물을 먹어 제대로 작동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교복이 비에 젖은 탓에, 정류장에 놓인 의자에 앉기도 뭐해서, 가람은 멍하니 서서 셔츠 밑단을 그러쥐었다. 셔츠자락을 비틀어 짤 때마다 톡, 하고 발등에 물이 떨어졌다.
애초에 백건이 이 사단의 시발점이었다. 그딴 징그러운 말만 안했어도……. 화악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예뻐서. 그 자식은 뭘 먹고 그렇게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지…. 한참 백건을 향해 조그맣게 욕짓거리나 하고 있는데, 머리 위로 쓱 검은 우산이 씌워졌다.
“너, 지금 내 욕 하냐?”
“…백건?”
“다리도 짧은 게 쓸데없이 빠르기만 해서……”
그렇게 말하며 백건이 가람의 품에 우악스레 뭔갈 안겨주었다.
“뭐야? 뭐야, 너! 따라오지 말랬잖아!”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습게 비쳤을까. 가람이 허둥지둥 말을 잇지 못하자, 백건이 푹 숨을 뱉으며 비에 젖은 머리를 털었다.
“너 우산 없을 것 같아서.”
그 말에, 그제야 제 품에 안긴 투명한 비닐 우산 하나가 보였다. 가람은 멍한 표정으로 백건을 올려다보았다. 아, 다 젖었네…. 조그맣게 툴툴대는 그 목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기만 했다. 가람은 백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교복이니 머리에 묻은 물기를 한참이나 털어대다, 그 시선을 눈치 챈 백건이 씩 미소를 띠었다.
“왜 그렇게 봐?”
“……”
“왜, 너무 잘생…”
“……너, 원래 이래?”
어엉? 툭 뱉어진 가람의 말에, 백건이 인상을 찌푸렸다.
“뭔 소리야, 뜬금없이.”
아니, 그게…. 가람이 생각을 정리하기라도 하는 듯 쉬이 말을 잇지를 못했다. 백건은 드물게 인내심을 갖고 그걸 기다려주었다. 버스 한 대가 정류장에 멈춰 섰다가, 다시 떠나가기를 두어 번 반복했을 즈음, 내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민하던 가람이 운을 떼었다.
“아니, 너 원래 이렇게 모르는 애한테 말 걸고, 귀찮게 따라다니고 그러냐고.”
뭔가를 결심한 듯한 곧은 눈빛이었다. 백건은 그제야 그것이 별 의미가 없는 뜻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아니, 애초에 가람은 장난을 모르는 성격이었지만.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 눈에, 백건이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안 그래.”
가람은 입을 꾹 다물고, 그 뒤에 들려올 말을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여전히 백건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왜인지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어깨 위로 빗물이 떨어졌다.
“너라서 그러는 거야.”
백건이 가만히 몸을 숙였다. 가람이 주춤 뒤로 한 걸음 물러나자, 백건이 두 걸음을 다가섰다. 정류장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도, 가람은 여전히 백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그 숨소리만은 또렷하게 들려왔다. 눈이 계속해서 마주쳤고, 다문 입술이 살짝 달싹이는 게 보였다.
“몇 번이나 말했잖아. 널 그리고 싶다고.”
코가 언뜻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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