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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AU

둥굴레차!

백건X청가람

청춘예찬

14.10.27







가람과 백건은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졌다. 혼자 복도를 거닐던 가람의 어깨에 백건이 다가와 팔을 두르는 일도, 이젤 앞에 앉아 아무것도 그리지 않던 백건의 곁에 앉은 가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댄다거나 하는 일들이 참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 둘의 사이가 얼마나 가깝게 보였냐면, 십여 년을 백건과 친구로 지내던 은찬이 백건과 가람의 사이에 끼면 소외감을 느낄 정도였다. 은찬은 매번 내가 백건이랑 더 친한데하고 투덜댔지만 가람은 물론 백건조차 그 말에 질색을 했다. 나 얘랑 안 친해. 가람이 말하면, 너 그럼 어제 우리 집에 왔던 건 뭔데, 하고 백건이 받아쳤다. 그거야 니가 보여줄 게 있다고 했으니까그으래? 그래서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꾸역꾸역 따라오셨다? 두 사이에 불꽃이 튀면, 은찬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멀리로 피했다. 백건이 그렇게 장난스레 웃으며 비꼬는 것을 오랜만에 보았다. 은찬조차 백건과 친해진 지 꼬박 오 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그 널따란 집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운명인가보지. 너네가 그렇게 친해진 건. 은찬이 새까만 속을 감추며 넉살좋게 웃으면, 백건과 가람은 아니거든, 하고 아득아득 우기며 부정을 했다. 반박을 하는 그 모습마저 똑 닮아서, 은찬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너넨 어떻게 만나서든 친구가 됐을 걸. 내가 단언할 수 있어. 물론 둘은 그 말에 잔뜩 인상을 썼다만.





 

청가람.”



언제나처럼, 먼저 말을 건네는 것은 백건의 몫이었다.



그림 그리게 해줘.”



씰룩. 가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려. 니 맘이잖아.”



가람의 시선이 백건의 가방을 향했다. 가방 안에 노트가 있는 것은 분명했으나, 백건이 말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아니, 이런 거 말고.”



그럼, . , 소리가 나게 책을 덮고는 가람이 물었다. 백건이 진짜 몰라? 하고 되물었다. 몰라, 그딴 거 알아서 뭐해. 다 읽은 책을 품에 안으며, 가람이 일부러 의자를 끄는 소리를 냈다.



아니, !”

백건, 나 이것 좀 꽂아줘.”

아니, 그건 해주겠는데, 청가람!”

빨리, 나 팔 아파.”



인상을 찌푸리자, 백건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받아들었다. , 편하다. 조그맣게 속삭인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백건은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참아냈다. 청가람.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불렀다. 귀찮으니까 자꾸 부르지 마. 가람의 짧은 대답에 백건이 괜히 책장을 때렸다. 모서리에 찧은 손등이 얼얼하게 아팠다.



그까짓 이름 좀 부르면 어디가 닳냐? 왜 그렇게 까칠해?”

, 닳아. 그러니까 부르지 마.”

주은찬이 부를 땐 아무렇지도 않더니!”



!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가람이 웃음을 흘렸다.



넌 부르지 마.”

왜 차별하는데?”

넌 맨날 시덥잖은 소리만 하니까.”



으득 백건이 입술을 깨무는 걸 바라보며, 가람이 가방을 멨다. 갈 거야? . 아직 여섯신데? 꼭 일곱 시까지 있으란 법 없잖아. , 하긴, 같이 가! 쫄래쫄래 제 뒤를 쫓는 백건이 퍽이나 우스워서, 가람이 픽 웃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백건은 내내 가람의 이름을 부르며, 몇 번이고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문득 눈이 간 너의 발목이 눈처럼 하얬다. 발목을 감싸 안고 몸을 동그랗게 만 너는, 마치 깊은 잠에 빠져 든 여리고 여린 작은 짐승 같았다. 곱게 굽은 너의 등가죽에 오돌토돌하게 쇄골이 돋은 것이 보여 나는 그만 그것을 쓸어내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새빨간 너의 입술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행복하고 어여쁜 꿈이라도 꾸듯, 너는 사랑스런 미소를 짓고 있어서, 나는 그만 너의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야 말았다. 잠에서 깬 네가 나를 바라보았고, 우리의 눈이 마주쳤고, 그리고 나는 다시 네 입술을 깨물었다. 서로의 혀가 얽혔다. 반쯤 감긴 너의 눈이 그토록이나 아름다웠어서, 나는 다시금 네게 손을 대었다. ……마지막으로 기억이 나는 것은, 수도 없이 나의 이름을 부르던 너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감기었던 것과, 화악 내 목을 끌어안던 너에게서 질리도록 단 향이 풍기던 것 뿐 이었다. ……, 나 이거 언제까지 읽어야 돼?”



내내 손에 책을 쥐고 소리 내어 읽던 백건이 훽 책을 집어던지며 질색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가람이 제 앞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책과 백건을 번갈아 노려보자, 백건이 조심스런 손으로 던져진 책을 집어 얌전히 표지를 덮었다. 보기 드물게, 그 뺨이 새빨갛게 붉어져있었다.



그거 다 읽으면 해준다니까.”

내용이 이상하잖아, 왜 이딴 걸 읽으라는 건데? 너 혹시 막…… 변태 같은 건 아니지?”

웃기지도 않는 소릴. 지나가는 애들 붙들고 물어봐. 허구한 날 널 그리게 해달라고 말하는 놈이 비정상인지 내가 비정상인지.”



너도 썩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 같은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가람이 픽 웃음을 흘렸다. 불만 있으면 꺼지던가. 치사한 새끼. 백건이 다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한 글자 한 글자를 강조하며 중얼댔다.



, 그래도 해줘. 거의 다 읽었잖아.”

끝까진 안 읽었잖아.”

저거 끝이 어떻게 끝나는데?”

저 여자애가 죽어.”

?”



글쎄. 왜 죽게? 턱을 괴며 묻는 그 말에, 백건이 인상을 썼다. , ! 그건 좀 알려줄 수 있잖아.



남자가 죽였거든.”

……?”

그러니까, 맨 첫 장에, 그리고 중간 중간 나왔던 연쇄살인마 얘기가 저 남자였고, 그래서 여자랑 가깝게 지내던 거라고. 죽이려고.”



가람의 말에, 백건이 벙 찐 표정으로 물었다. 거짓말이지? 진짠데. 거짓말이지? 되물어오는 말에, 가람이 어깨를 으쓱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못 믿겠으면 니가 읽어보든가. 되려 당당하기까지 한 가람의 태도에, 백건이 못미더운 듯 한참이나 째려보더니,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마지막만 보지 말고, 끊은 데부터 읽어. 그래야 이해가 되지. 책장 너머로 가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장 맨 뒷장을 펼치던 백건이 입을 삐죽이며 책을 내던지던 부분을 펼쳤다. 백건이 책을 제대로 읽었던 건언제였더라. 그래, 어렸을 적 엄마가 침대 머리맡에 앉아 백건이 잠들 때까지 동화를 읽어주고는 했었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때에 읽어주었던 동화가 끝이었다. , 백건. 제대로 읽고 있냐. 톡 책상을 건드리며 가람이 물어왔지만, 백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난히 책을 읽는 속도가 느린 것 같았다. 백건은 한 글자, 한 글자를 외우기라도 하듯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 멍한 표정으로 책을 덮은 백건을 바라보며, 가람이 씩 미소를 지었다.



내 말이 맞지?”



백건은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침은 어느새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둑어둑해진 길에 듬성듬성 가로등 불빛만이 바닥을 비추었다. 백건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휘청거리며 걸었다. 언제나와는 다르게, 가람이 백건의 뒤로 두어 걸음을 물러나 걷는 채였다. 키는 멀대 같이 커서는, 휘청대는 꼴이 퍽이나 우스웠다. 책을 덮은 후로 백건은 내내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그렇게 좋냐, 하고 묻던 가람의 말에 으응, 하고 대답했다. 가람은 멍하니 백건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다, 조용한 소리로 백건의 이름을 불렀다.



백건.”

.”

, 무슨 그림을 그려?”



가람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하게 들렸다. 백건도 차츰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백건. 다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백건이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넌 뭘 그리냐니까. 재촉하듯, 가람이 물었다.



.”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뭘 그리냐고.”

그러니까, 날 그린다니까?”



백건이 훽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어둠에 젖어, 그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진심이야?”



황당한 목소리였다. 백건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내 주머니에 박아 넣었던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뭐해? 물어오는 가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백건은 천천히 자판을 눌렀다. 이거. 백건이 툭 제 손에 들려있던 휴대전화를 던졌다. 이 미친! 조그맣게 욕지거리를 뱉으며 가람이 손에 휴대전화를 쥐었다. 이거 이번에 나온 새 모델이잖아? 근데 이걸 던져? 아주 미쳐가지고…… 내내 투덜대던 가람의 입술이 멈췄다. 백건은 소매로 슥 코밑을 훔쳤다.



진심이야.”



백건이 던져준 것은 제 이름 두 글자를 친 인터넷 화면이었다. 백건. 재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프로필 사진과, 그 곁에 간략하게 나오는 조그마한 글자들에 가람이 입을 다물었다. 그거, 그 밑에 내 그림 있어.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백건이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블로그와 카페등에 게시된 게시물들이 보였다. 가람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백건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의심도 많지. 조그맣게 속삭이는 말과 함께, 새로운 화면이 떴다. 포스팅 된 글에는 백건의 얼굴을 그대로 옮겨 그린 듯한 그림들이 수십 점이나 있었다.



너 진짜 너만 그리는 거야?”

, 그랬는데



그랬는데? 과거형인 그 어투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람은 다시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그림들 아래에, 이런저런 말들이 적혀있었다. 팔불출 같은 그 말투가 마음에 차지가 않았다. 유난스러운 수식어, 영양가 없는 말들을 거르며 가람이 빠르게 사족을 읽어나갔다.



미친.”



이건 뭐 뻑하면 미쳤대. 백건이 킥킥거렸다. 가람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 백건이 다시 표정을 고쳤다.



“5년이나?”

.”

그럼 나보고 그리고 싶다느니 한 건 뭐였는데?”

그냥, 그리고 싶어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솔직히 말하자면 거기에 흔들린 것이 사실이었다. 가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백건 또한 마찬가지였다. 둘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저 액정을 누른 가람의 그 조그마한 손가락만이 움직일 뿐이었다. 백건이 거듭해서 가람의 이름을 불렀다.



생각해 볼게.”

진짜?”

, 생각보다 대단한 것 같기도 하고



그냥 학교의 유명인사라고만 생각했지, 솔직히 말하자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으니까.



그리고…… 그림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가람의 머릿속에 똑바로 저를 바라보던 백건의 그림들이 떠올랐다. 5년 동안 그렸다는 그 그림은, 모두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구도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완벽한 그림. 사실, 가람은 지금껏 제가 보아왔던 그 모든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보다, 백건의 그림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림 보는 눈은 없으면서.”



백건은 꼭 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모델 필요 없다 이거지?”



가람이 피식 웃으며 먼저 걸음을 떼자, 백건이 얼른 표정을 바꾸며 가람의 팔을 붙들었다. 뺨이 붉게 물들고, 언뜻 기쁜 기색이 비쳤다. 백건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떨어진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 필요해. .”



. 몇 번이나 그 말을 강조하며, 백건이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