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AU
둥굴레차!
백건X청가람
청춘예찬
14.10.29
뚜벅, 하고 울리던 소리는 이따금 멈추고 다시 들리기를 반복했다. 저 멀리 복도 끝에서부터 작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이젤 앞에 앉아, 백건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곧 멈추었다. 얇은 유리너머 나뭇잎 사이로 부서진 햇살이 들어왔다. 미술실 바닥이 햇볕에 얼룩이 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느릿하고, 선명했다. 느린 걸음은 창가에 놓인 의자 앞에서 멈추어 괜히 그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의자를 쓸어보기도 했다. 백건이 이젤에 놓인 캔버스에 손을 뻗었다. 새하얀 바탕. 그 캔버스 너머에, 가람이 있었다. 가람은 다리가 세 개 달린 의자에 가만히 앉아 백건을 노려보았다. 그 새빨간 눈이 지독하게도 예뻤다. 꾹 다물고 있는 입술이 참으로 탐스러웠다. 얌전히 머리 위에 얹은, 엉성한 솜씨로 만든 화환에서 확 단 내가 풍겼다. 화단에 피어난 장미와 이름 모를 꽃 몇 개를 엮어 만든 화환이 어찌나 예쁘던지. 꽃을 꺾던 내내 곁에서 투덜대던 가람도, 지금만큼은 말이 없었다. 그 좁고 좁은 미술실 안에, 가람의 숨이 가득 찼고, 머리에 얹은 화환에서 나는 꽃내음이 났고, 그리고 가만히 가슴이 뛰는 소리만이 조용하게 울렸다. 가람은 무릎 한쪽을 끌어안았다. 발뒤꿈치가 의자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백건은 저를 바라보는 가람의 눈과, 새하얀 팔레트와,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캔버스를 바라보며, 문득 추억에 잠겼다.
어렸을 적엔 세상의 그 모든 것이 어여쁘다 생각했다. 아스팔트 도로가 부서진 틈으로 하잘 것 없이 피어난 꽃도, 그저 흘러 다니기만 할 뿐인 구름도, 저 나뭇가지 어딘가에 앉아 울고 있을 새도, 제 발치로 다가와 얼굴을 부벼대는 고양이도, 다아 저마다의 그 무언가를 가진 것만 같아서였다. 답지 않게 원고용지를 펼치고, 만년필을 들어 글을 쓰는 아버지의 등에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TV에 나와 저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던 누나의 눈가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별빛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제가 누나와 똑같은 행동을 하면, 제 손에서도 으레 그랬듯 별빛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참으로 잔혹하기만 했다. 그 어리고 조그맣던 아이가 깨닫기에는 무척이나 거대할 정도로. 백건이 아무리 누나와 똑같은 행동을 하여도, 누나와 똑같은 말을 해도 제 손에서 별빛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처음 깨닫게 된 것은 여덟 살이 되던 해였다, 그랬음에도 포기하지 않았고, 그랬음에도 계속해서 누나를 따라 그렸다. 환하게 웃는 얼굴, 수줍게 저를 바라보던 표정, 금방이라도 울음을 흘릴 듯 젖어버린 눈으로 제 이름을 부르던 그 모습들을. 결국 백건은 제게서는 영영 별빛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제가 아무리 노력한다하여도 제 손끝에서 별빛이 반짝거리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백건은, 제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거울을 보며 여러 표정을 연습했다. 누나를 따라 환하게 웃어보기도 했고, 수줍은 미소를 지어도 봤고, 젖어버린 눈으로 거울 속의 저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것이 왜 그렇게나 비참하게 느껴졌던지. 결국 백건의 그림은 모두 한결같이 똑같은 표정이 되었다. 미소도, 슬픔도, 그 아무것도 없이 그저 한 곳을 바라보기만 하는 얼굴. 백건은 언제나 누나와 제가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했지만, 끝까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도서실에 앉아 책을 읽는 가람을 보았던 순간에, 깨달은 것이다. 제게서 반짝반짝 빛나던 별빛이 떨어지지 않은 이유, 아무리 노력해도 그 별빛을 손에 쥘 수가 없던 이유. 가람을 보니 그것이 확실했고, 그래서 그토록이나 매달렸는지도 몰랐다. 혹시라도 제가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봐. 저는 가지지 못한 것을, 가람이 가지고 있었으니.
백건은 언제나 사랑을 받는 쪽이었다.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어도, 아무리 재수 없게 굴어도 많은 이들이 백건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사랑을 속삭여주었다.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백건에게 있어 사랑은 그저 그 뿐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고, 바람이 느리게 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 생각만으로도 하루 온 종일이 행복하다는 걸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백건은 언제나 사랑을 받기만 했기에 누군가를 사랑할 줄을 몰랐다. 사랑을 말하는 방법,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 그 무엇도 알지 못한 채였다.
그래서 별빛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제 손길이 닿은 자리가 반짝반짝 빛이 나지 않고, 웃는 얼굴, 입술 사이로 그 별빛이 비집고 나오지를 않은 것이다. 백건은 그걸, 가람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가람의 몸에선 언제나 별빛이 떨어졌다. 그 주위가 환하게 빛이 났고 머물던 자리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워보였다. 언제나 발그레하게 물들던 뺨, 깊게 잠겨버린 목소리랑, 사랑에 푹 절은 저를 또렷하게 바라보던 그 눈을 바라보며, 사랑에 빠진 얼굴이란 건, 분명 저런 표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백건이 가만히 붓을 들었다. 이러저런 색을 묻혀 새하얀 캔버스 위에 색을 칠했다. 상아색 피부 위로, 탁한 색이 깔렸다. 눈썹을 덮은 흑갈색의 머리칼. 바로 등 뒤로 빛이 비쳤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제 주위에서 빛나던 그 별빛 때문인지, 유난히 반짝반짝 빛이 나 보였다. 그 위에 가볍게 얹어진 화환이 보였다. 붉고 노란 색으로 화려하게 물든 꽃들. 백건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문득 가람과 눈이 마주쳤다.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저 눈이 좋았다. 새빨갛게 물든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사랑에 푹 절은 듯 어여뻐 보이기만 했다. 가만히 백건이 손을 멈추었다. 여지껏 꾹 다물고 있던 가람의 입술이 떼어졌다.
“뭐야, 백건.”
퉁명스러운 그 말에 백건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예쁘다고?”
픽. 백건이 웃음을 흘리며 가람을 쳐다보았다. 제가 말해놓고도 퍽이나 부끄러웠던지 가람의 볼이 제 눈과 똑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그게 참 예뻐서, 백건은 가람에게서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처음엔 그렇게 질색을 하더니……”
“하도 많이 들어서 익숙해져버렸잖아. 어쩔 거야?”
힐긋 가람이 눈을 흘겨 백건을 노려보았다. 백건의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가 걸렸다. 어쩌면 좋겠어? 징그럽게 걸린 미소에, 가람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얌전히 붓에 묻어있는 물감을 덜어내며, 백건이 가람의 이름을 불렀다.
“글쎄. 책임이라도 질까?”
“지이랄.”
푸하, 가람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귀까지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가람이 질색하는 소리를 냈다. 백건은 제가 말해놓고도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가람이 제 붉어진 얼굴을 가리느라 얼른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 탓에, 머리에 얌전히 얹어져 있던 화환이 툭 떨어졌다. 가람은 의자에서 내려와 떨어진 화환을 주웠다. 얼른 자세나 잡아. 백건이 가람을 보채며 인상을 쓰는 시늉을 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조그맣게 중얼거리더니, 가람이 톡 제 머리에 화환을 떨어뜨렸다. 그리고선 얼른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더듬이처럼 툭 튀어나온 머리칼이 짧게 흔들렸다. 바로 앞에 비치는 햇볕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눈이 부셔서, 백건이 눈을 가늘게 떴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백건에게, 가람이 장난치듯 속삭였다.
“어때, 예쁘냐.”
그러고선, 낄낄. 짧게 웃으며 다시 의자 위로 올라갔다. 가람은 다시금 아까와 똑같은 자세를 잡았다. 가슴께까지 바짝 무릎을 당기고, 그 위로 얼굴을 가져다댔다. 투툭, 발치에 걸려있던 실내화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 손에 잡힐 듯 얇은 발목이 보였다. 복숭아 뼈가 투박하게 튀어나온 것도 예쁘네. 백건이 들리지도 않을 소리로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뭐?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는지 가람이 되물었다. 아니, 얼른 자세나 잡으라고. 돌아온 대답이 영 탐탁치 않았는지, 가람이 슬쩍 미간을 좁혔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매고, 단추 두어 개를 푼 셔츠 사이로 선이 얇은 쇄골이 드러났다. 아까랑 똑같은 거 맞아? 나른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가람의 말에, 응, 예쁘다. 하고 백건이 조그맣게 속삭이며 웃었다. 달콤한 꽃 내음이 풍기던 미술실이, 콩콩거리며 뛰던 심장소리만이 들리던 미술실이, 어느새 둘의 웃음소리로 가득 차버렸다.
눈부시게 비치던 햇볕이 어느새 붉은 빛으로 물들어갔다. 백건은 가만히 붓을 내려놓았다. 저를 바라보는 다정스런 눈빛, 화려한 화환과 다리를 끌어안고 있던 여린 손목까지. 입 밖으로 이런 말을 뱉는다면 재수 없다는 말을 들을 게 뻔했지만, 마치 그 속에 가람이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백건은 그만 숨을 삼키는 소리를 냈다. 다 그렸어? 캔버스 너머에서 가람이 조그맣게 물었다. 백건이 고갤 끄덕이자, 가람이 얼른 의자에서 내려왔다.
가람이 다가올 때마다 신발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가까워질 때마다, 여전히 향을 잃지 않은 화환에서 단 내가 났다. 그 냄새에 질식할 것 같은 가까운 거리였다. 가람은 가만히 백건의 등 뒤에 서선, 찬찬히 몸을 숙여 캔버스를 뜯어보았다. 그 거리에서, 가람의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와. 가람이 조그마한 소리로 감탄하며, 백건과 눈을 맞추었다.
“소문이 사실이었나보네.”
조그마한 소리에, 백건이 응? 하고 되물었다.
“너 진짜 잘 그린다.”
물론, 나야 그림 보는 눈은 없지만. 그렇게 덧붙이며 가람이 씩 웃었다. 백건도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며 가람을 따라 웃었다. 뭐, 나야 항상 잘 그렸지. 그래, 오늘은 재수 없어도 봐준다. 가람이 백건의 어깨를 턱으로 짓누르며 얌전히 눈을 감았다. 붓을 쥔 채 힘없이 떨어진 팔위로, 가람의 팔이 겹쳐졌다. 꼼짝없이 백건이 가람의 품에 안긴 꼴이 되었다. 가람의 가슴이 닿은 등에 콩콩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온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미술실의 바닥도, 하얀 캔버스의 뒷면도, 가만히 백건의 목을 끌어안은 가람의 팔도, 가람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가만히 눈을 감은 백건의 눈꺼풀도 모두 노을에 젖어 들어갔다.
“백건.”
깊게 잠긴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백건은 어, 하고 짧게 대답했다. 콩콩. 뒤통수에 닿은 가슴이 뛰는 소리가 더 커졌다. 나, 할 말이 있어. 조심스레. 가람이 속삭였다. 뭔데, 청가람.
“나 있지……”
가람이 슬쩍 백건의 귀에 입을 가져다대며, 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나, 네가…… 소곤소곤. 그 소리는 아주 작아서, 아무도 없는 미술실에조차 들리지를 않았다. 가람의 말이 길게 늘어졌다. 힐끗 백건이 가람의 얼굴을 살폈다. 새빨갛게 물든 그 얼굴이, 퍽이나 볼 만 했다. 이리와 봐. 백건이 가만히 중얼거리며 가람의 팔을 끌어당겼다. 푸하,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가람을 따라 저도 가람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나의 청춘은 거기에 막을 내렸다.
그 시절의 나는 지겹도록 너의 이름을 불렀고, 질리도록 네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너의 웃음이 좋았고, 나를 바라보는 너의 그 눈이 좋았고, 내 이름을 부르던 그 입술이 좋았다. 네가 잠이 든 때면, 나는 언제나 너의 손끝을 쥐고 너의 귓가에 입속으로 가만히 사랑을 속삭이고는 했다.
나의 청춘은 거기에 끝나버렸다. 그러나, 너의 청춘만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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