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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친님들과 한 글 리메이크! 원글(http://lemoncake0308.tistory.com/20)

둥굴레차!

백건X청가람

불면증

14.10.18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정의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을 수도 없었고, 그저 암흑 속에 혼자였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내게 그러라고 말한 것도 아닌데, 나는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제자리에 오도카니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탓에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내 바로 옆을 지나가는 것이 무엇인지, 내 발목을 부여잡는 끈적한 것이 무엇인지, 나는 그 무엇 하나도 확신하지 못한 채로 그곳에서 누군갈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단 하나, 내가 그곳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아무리 내가 이렇게 기다려도 그 누군가는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것과, 내가 지독한 슬픔에 빠질 것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그러자 눈물이 났다. 끔찍한 사실을 마주하자 봇물이 터지듯 눈물이 흘렀다. 나는 결국 내 눈물에 빠져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눈물에 들릴 리 없는 비명을 뱉으며, 그저 그를 수없이 부르기만 했다.

 


새벽 두 시. 나는, 또다시 잠에서 깨어났다.

 

 

 

 

불면증에 걸린 지 오래에요.”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의미 없이 찬물에 담긴 수건을 비틀어댔다. 그거, 소용없어요. 조그맣게 속삭인 내 말에, 그녀는 아, 그러니. 하고 적잖이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을 꾹 다물고 이따금 흘깃 나를 바라보다, 내가 약간 시선을 돌리면 얼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조심스레 밖으로 나가고는 했다. 그것은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그녀는 역한 것을 오래토록이나 참지 못했으니까.


그럴 용기만 있다면 그녀에게 묻고만 싶었다. 내가 무서워요? 아마 예전의 그녀였더라면, 내가 너를 왜 무서워하겠니, 하고 속없는 웃음을 흘리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어 줄 텐데. 그렇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잠이 안와요. 누가, 누가 나를 찾아올 것만 같은데, 암만 기다려도 오지 않아요저 멀리에서 목소리도 들려요. 내 이름을 참 애타게 부르는데, 그럴 때마다 마음이 아파요.”

가람아.”

이런 건 처음이에요. 이게 뭐에요? 이런 게 죄책감이에요?”

 


이런 건, 알려준 적 없었잖아요. 원망이 가득 담긴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입을 틀어막고서 울음을 흘렸다. 불필요한 감정은 만들지 않았다 단언할 수 있었다. 딱 내가 해야 할 일까지 만을 한 것이고, 그 이상의 선을 넘은 적이 없다 생각했다. 한 번 그렇게 생각하자, 기억이 봇물이 터지듯 터져버렸다. 왜인지 네 얼굴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나를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내 이름을 불렀던가? 어떤 식으로? 너는 왜 그렇게, 내게 매달렸던 걸까.



.”

가람아, 여기, 여기 수건 있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끓어오르는 역겨운 기분이 듦과 동시에 벌어진 입술 사이로 피를 토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는 고통, 나는 옷과 이불을 흠뻑 적신 핏덩이를 생각했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찔렀다. 팔다리가 꺾여나가고 왼쪽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뒤통수가 깨져 제대로 눕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몸을 한 번 움직이려 할 때마다, 그 어딘가에서 산산이 조각난 뼛조각들이 더욱 깊이 파이듯 몸이 아팠다. 그럼에도 숨이 붙어 있었고, 멀쩡히 살아있었다. 왈칵 눈앞에서 피가 쏟아지는 걸 보았다. 팔다리가 꺾이며 새하얀 뼈가 피부 위로 솟아오르는 걸 보았다. 몸이 망가지자 여의주는 사라졌다. 사신의 증표인 여의주가 사라지자, 그는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가볍게 등을 돌렸다. 여의주가 사라졌고, 금방이라도 죽을 듯 숨을 헐떡이는데, 나는 살아있었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까. 용족이기 때문에? 직접 생살을 파내고 온 몸을 망가뜨린 것은 그의 소행이었다. 망설임이라고는 한 점도 묻어나지 않던 냉정한 표정. 그게 여지껏 잊혀지지가 않는다.


사신은 되지 않을 거에요, 수련도 안 할 거구요. 그 말에, 그렇다면 쓸모가 없지, 라고 말하던 그의 눈은 소름이 끼치도록 새빨간 색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잔인한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그것은 그저 흘러가는 일일 뿐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겪었어야 할 일이라고 말하듯, 그는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다시는 예전의 몸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온전한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도 없을 것이고, 멀쩡한 다리로 땅을 딛는 일도 없을 것이며, 그 손끝으로 무언가를 느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죽음이,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일 뿐이며 언젠간 마주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랬음에도 나는 나의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언젠간 사신이 되어, 불사의 몸을 부여받아 영영 하늘에서 그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그들? 우습군. 피가 묻은 입술 위로 피식 웃음이 흘렀다. 중앙에서 함께 지내게 된 지 고작 일 년이었다. 그런데 나는 벌써부터 그들과의 미래를 그리고 있었나?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 나의 아비라는 작자의 소행이라는 것보다, 그 사실이 더 우습게 다가왔다. 이제는 무엇이 진실인지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저 부러져버린 다리가 아파오는 것인지, 더 이상 왼쪽 눈을 뜰 수 없다는 사실이 죽도록 비통한 것인지, 숨을 쉴 때마다 무언가에 폐가 짓눌려 오는 이 기분이 불쾌한 것인지.


모두 아니었다, 모두 틀렸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그 무감각 속에서 단 하나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여지껏 은근하게 아려오는 이 왼쪽 뺨이었다. 드문드문 기억이 났다. 네 울음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그리고, 네 손이 닿았다. 네 모든 진심을 담았던 듯 꽤나 시원하게 내려쳤던 것만 같은데, 우습게도 그곳엔 상처 하나 남지 않았다. 네 손이 꽤나 매서웠음에도, 나를 바라보는 너의 눈에 잔인한 무언가가 담겨있었음에도. 더더욱 우스운 것은, 그 자리만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길게 남은 흉터처럼. 너의 손이 닿은 자리. 네가 나의 이름을 거듭하며 울음을 보였던 그 자리. 그 왼쪽 뺨에 남은 것은 상처가 아니었다. 기억의 잔재였다. 그 날의 기억이 온통 조각나 왼쪽 뺨에 붙었다. 그것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고, 내 몸에 난 상처보다 더욱 아려왔다. 나의 고통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나를 봐, 청룡! 내 쪽을 봐! 그 녀석이 네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그렇게 쪼르르 달려가는 건데? 발악하듯, 네가 소리쳤다. 입 닥쳐, 백건. 날카로운 내 말이 네게 닿았다. 너는 여전히 포기를 몰랐다. 그 사람이 이제 와서 네게 호의를 보일 거라 생각해? 이제까지 너를 냉대하고 무시하던 그 인간이! 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와 박혔다. 너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내가 끝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던 올곧은 사실들이라, 나는 다시금 네게 잔인한 말을 쏟아냈다. 입 닥치라고 했어. 너는 미련하게도 나를 놓지 못했다. 내게 애원을 하며 제발 제 곁에 있어 달라 사정했다. 그랬음에도 나는, 너를 돌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가 나를 원하고 있다. 난생 처음으로, 그가 내게, 제 곁으로 오라고, 그렇게 말해주었다. 난 가야만 했다. 그가 나를 바라봐주며, 수고했다, 라고. 고맙다고 말해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너는 왜 나를 놓지 못하는 걸까. 정신 차려, 청룡. 내가 널 사랑한다잖아! 잽싸게 뒤를 돌아 갈 것 같은 내 뒤로 그 말이 걸렸다. 왜인지 모르겠다. 웃음이 났고, 어이가 없었다. , 사랑?



네가 나한테 느끼는 건 사랑이 아니라, 욕정일 뿐이잖아.”



잔인하고 잔인한 말. 나는 그 말을 뱉어내는 데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내 손목을 붙들고 오래토록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날이 떠올랐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며, 무슨 할 말이라도 있던 듯 몇 번이고 입을 떼었다 다물었다를 반복했다. 뭔데, 백건. 내 말에 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해, 청룡. 네 그 말이 참 아렸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었다. 너의 소름끼치는 눈을 잊을 수가 없다. 잠에 들기 전, 식사를 준비하는 내 뒷모습을 바라보던,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나를 노려보던 그 눈을. 그러니 그건 사랑이 아닌 것이다. 너는 그저 그것을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려는 것이다.



욕정을 풀 대상이 필요하다면 잘못 짚었어, 그저 그걸 사랑이라 착각하는 것



말을 채 이을 수도 없었다. 네 손이 내 뺨을 쳤다. 순식간에 돌아간 고개에 입술을 깨물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고, 네게 잔인한 말이라도 쏟아버리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즉시 후회했다. 너는 금방이라도 눈물이라도 흘릴 듯 붉어진 눈가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이름을 부르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며 너는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너의 그런 얼굴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딘가 꽉 막혀버리듯 제대로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네 어깨가 떨리는 걸 그 때 처음으로 보았다. 주먹을 쥔 손을 자꾸만 고쳐 쥐었고, 짓이겨진 입술에서 피가 터졌다.



,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네 목소리가 참 낯설었다. 머릿속이 반으로 갈려 무언가가 봇물처럼 밀려들어와서, 그래서 나는 네 얼굴을 더 이상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등을 돌렸다. 왜 가슴 한 구석이 그렇게 아팠는지도 모르겠다. 왜 자꾸만 발을 헛디뎠는지도, 왜 자꾸만 고개를 돌려 네가 나를 쫓아오지는 않을까하는 기대를 놓지 못했는지도, , 어째서, 자꾸만. 붉어진 네 눈이 아른거렸는지도.


단순히 너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그걸 보고 있는 것이 버거웠다. 나는 누군가를 위로해 준 적이 없어서, 누군가의 상처를 달래주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그래서 그렇게 도망쳐버린 것이다. 차마 너의 상처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그 때 조심스런 손으로 너를 안아주기라도 할 것을. 미안하다 조그맣게 속삭이며 네 어깨를 끌어안기라도 할 것을. 그랬으면, 지금처럼 이렇게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진 않을 것이다.



가람아, 어디 아프니? 약 먹을래?”



후두둑 눈물이 쏟아졌다. 얕게 눈가에 고여 덩어리를 이루던 눈물방울이 뺨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당황한 듯 손등으로 내 눈가를 쓸었다. 금방 멎을 거라 생각한 눈물은 쉼 없이 흐르기만 했다. 짓이겨진 입술 사이로 네 이름이 새어나올 것 같았다. 이런 게 죄책감일 리가 없다. 네 목소리가, 네 얼굴이, 너의 행동 하나하나가 급격하게 쏟아지며 머릿속을 가득 채워냈다. 나는 그저, 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숨을 쉴 때마다 갈비뼈가 폐를 찌르고, 눈도 한 쪽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저 어떻게든 네가 보고 싶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끅끅거리는 울음이 새어나왔다. 정말이지. 이런 게 죄책감 일리가 없다. 이토록 가슴이 아리고 무언가에 짓눌린 것 같은 이 기분이, 이토록 네가 보고픈 이 감정들이 죄책감이라면, 그것은 참 잔인한 것이다.


,. 입속으로 가만히 너를 불렀다. 당연하게도, 너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