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de-image




트친 ㅊㅊ님 백번달성표 보상!

8살 백건, 18살 청가람. 가람이 나이가 달라졌지만....달ㄹ....졌지만....(쥬금

둥굴레차!

백건X청가람

땅거미가 지던

14.11.06







땅거미가 질 무렵. 언제나 끽끽거리며 괴상한 소리를 내는 그네에 앉아, 멀거니 먼 곳만 바라보는 조그마한 아이가 있었다. 암만 나이가 많아봐야 기껏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정도일까. 초봄인 탓에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었음에도, 그 아이는 팔꿈치를 겨우 덮는 녹색 카라티에,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 하나를 걸친 채였다. 그 시간이면 느즈막히 걸어와 집으로 돌아가던 가람이 그 아이를 본 지 꼬박 한 달. 그 한 달이라는 긴긴 시간동안 단 한 번도 눈조차 마주쳐본 적 없고, 안녕, 하고 손 인사나, 말 한 마디도 섞어본 적이 없었는데. 가람은 어째서 이 아이가 저를 올려다보며 손으로 꼭 쥔 옷자락을 놓지를 않는지가 의문이었다.

 

이름이 뭐야?”


……꼬마야, 너 나 알아?”

, 이름이 뭐야?”

 


나 안다며. 가람이 슬쩍 인상을 찌푸리자 아이가 거듭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물어왔다. 알아. 이름이 뭔데? 조그마한 입으로 이름을 묻고, 노을에 비쳐 샛노랗게 빛나던 눈동자로 오래오래 바라보고, 제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그 옷자락을 놓아주지 않으며, 온몸으로 가람을 붙잡고 있었다. 내내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아이를 바라보며, 가람이 이마를 짚으며 푹 한숨을 쉬었다.


 

청가람이야.”

청가람?”

, 너는?”


 

, 아이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퍽이나 싸가지가 없는 꼬마로구나 생각했는데, 오물거리는 저 입을 보니 어린애는 어린애로구나 싶었다. 한참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조그맣게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건, 이라고 해.”

 


씨익 웃는 그 모습이 아이답지 않게 참 잘생겨서, 가람은 그만 멍청하게 말을 더듬었다.

 

 

 

 

 

이름을 알려주는 게 아니었다.


나흘 전 놀이터에서 내내 그네에 앉아 먼 곳만 바라보던 아이는, 갑작스레 가람의 옷자락을 쥐고 이름을 묻고, 그 이름을 곱씹더니 나흘이 지난 지금까지 매일매일 가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가람을 부르고, 가람의 옷자락을 늘어 쥐고 기어이 모래밭으로 들어가 모래성을 쌓았다. 이거는 내 성이고, 이거는 니 꺼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형이라고 부르라고 말을 했건만. 제 말을 죽어도 듣지 않는 것 같아 형이라 불리기를 포기한 지는 이미 오래였다. 그렇게 어영부영 백건과 놀아주다보니, 자연스레 소매 끝이, 자켓이 흙투성이가 되었다. 매일매일 옷에 잔뜩 흙을 묻혀 돌아가는 가람을 보며, 그의 아버지는 짧게 혀를 찼다. 그 사실이 미치도록 싫었다. 가람의 아버지는 언제나 가람에게 관심이 없었다. 유난히 제 아내를 챙겼고, 그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가람이 아주 어렸을 적, 가람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유일한 모습은, 다섯 살 난 가람을 앉혀놓고, 더 이상 저를 귀찮게 하지 말라던 그 잔인한 모습 뿐 이었다. 그 이후로= 처음으로 가람에게 향한 관심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저를 향한 경멸이었다니. 오늘도 제 손을 잡아끄는 백건의 손을 뿌리치며, 가람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너랑 놀아주지 않을 거야.”

……?”

지겨우니까.”

 


고작해야 여덟 살 정도밖에 먹지 않은 아이에게 하는 말치고는 참 지독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릴 적 제 아버지가 저에게 했던 것 마냥. 그러나 가람은 오늘도 돌아올 그 경멸에 찬 눈이 싫었다. 짧게 혀를 차며 피식 웃음을 흘리는 그 소리가 끔찍했다. 반쯤 입이 벌어진 채 저를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에, 가람이 훽 등을 돌렸다.

 


아저씨 때문이야?”

 


가람의 발이 멈춘 건, 그 때였다.

 


아저씨가, 건이랑 놀지 말래?”

……

그랬어? 건이랑 놀면 안 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가람이 으득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저 조그마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가람은 맘껏 상처라도 주고 싶었다. 이대로 이렇게 돌아서면 내일도 제 손을 잡아끌고, 제 이름을 부를 것이 뻔했다. 난 그냥 네가 싫은 거야. 그런 말이라도 해주려 등을 돌리는데, 불쑥 제 앞에 조그마한 사탕 반지가 내밀어졌다. 백건은 어느새 벤치 위에 올라왔는지, 가람과 눈높이를 맞추며 어깨를 으쓱였다. 청가람. 백건은, 언제나처럼. 예의도 모른 채 가람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지켜줄게.”

 


그 언젠가, 클리셰가 난무하던 드라마에서, 소설 속에서 보았던 그 말과, 똑 닮은 말이었다.

 


그러니까, 나중에 내가 어른이 되면.”


 

평소엔 찾아볼 수 없던 나름의 진지한 표정에, 가람이 그만 웃음을 흘렸다. 긴장이 탁 풀렸다. 저 조그마한 손에 쥐어져 있는 사탕반지가, 노을에 비쳐 붉은 색으로 물들어갔다.

 


나랑 결혼해줘.”


 

고작 어린 아이가 뱉은 그 말이 뭐라고. 포장을 벗긴 반지가 가만히 가람의 손가락에 들어맞았다. 백건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가람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가람은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게 뭐야아…… 어느새 분위기가 누그러져서, 가람은 장난스레 백건의 어깨를 툭 밀었다. 노을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난히 그 하얗던 얼굴이 붉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가람도 그만 그 장난에 흥을 맞춰주기로 했다.


 

그래, 알았어.”


 

평소완 다르게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가만히 몸을 숙였던 탓에, 백건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런데 늦으면 누가 채가니까


 

가만히 내민 새끼손가락에, 조그마한 손가락이 얽혔다.


 

빨리 데리러 와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