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AU, 백건과 청가람이 같은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설정.
트친 ㅅㄴ님의 달성표의 보상입니다.
둥굴레차!
백건X청가람
겨울, 꿈
14.11.08
너는 못하는 것이 없어 보였다. 성적은 언제나 상위권이었고, 스포츠도 만능이었다. 미술 시간에 한 번 붓을 쥐었다하면 선생님조차 너를 바라보며 혀를 둘렀고, 음악 시간 또한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배웠어, 수많은 질문을 향해 멋쩍게 웃으며, 너는 바이올린이니 플롯이니 하는 것들을 켜대고는 했다. 네 인생에 못하는 것이 무엇일까. 아니, 그런 것이 네 머릿속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항상 네 주위엔 사람이 꼬였고, 너는 옅은 미소를 띠며 네게 꼬여드는 그 모든 사람들을 얼러주었다. 나는 네가 참 신기했다. 언제나 사람에게 거리를 두는 것 같은 묘한 얼굴로, 제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쳐내지 않고 모두 그 한 몸에 받아주었다. 나는 그 멀리서 너를 지켜보기만 했다.
네가 체육창고의 뒤편에서 혼자 숨을 죽인 채 울고 있는 걸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 어딘가로 전화를 걸며, 너는 울고 있었다. 나, 씨발…… 존나 힘들다고. 너는 꾹꾹 참았던 그 무언가를 뱉어내듯 아주 조용한 소리로 울었고, 계속해서 욕짓거리를 뱉어내었고, 끝내 전화를 끊고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는 소리를 내 울었다. 나는 비겁하게 그걸 훔쳐듣고 있었다. 다, 지긋지긋해, 다들 병신이야, 내가 지들을 좋아하는 줄 알아. 너를 좋아하던 그 누군가가 들었으면 참으로 잔인했을 말. 차디찬 계절의 끝을, 온 몸으로 지탱하는 가녀린 새순. 나는 가만히 걸음을 돌렸다. 마침내 노오란 꽃망울 머금어 터뜨리는 겨울 샛강, 절벽, 골짜기 바위틈의. 마음 한구석이 쎄하게 아파왔다. 저만치서 홀로 환하게 빛나는 그게. 나는 그게 너인 줄로만 알았다. 아니, 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네가 네가 아니었다니. 너를 따라 괜한 울음이 나왔다. 나는 소매로 눈가를 꾹꾹 눌러 닦았다.
어쩌면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날 이후, 나는 너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너는 여전히 못하는 것이 없어보였지만, 그 전과 확연하게 달라졌다. 너는 애초에 잘하던 것이 아니라, 잘하는 척을 할 뿐이었다. 애초에 그 잘함이 몸에 배어있었지만, 그게 자연스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비추려는 너의 노력이 서려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너를 가만히 바라보던 눈이, 어울리지도 않는 감상에 젖어 축축해진 것은.
그러다 너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나는 숨을 쉴 수가 없게 되었다. 너의 그 샛노란 눈동자가 마치 나를 꿰뚫는 것 같아, 내 시꺼먼 속을 내다보는 것만 같아 가슴이 뛰고 손에 땀이 배었다. 나는 책을 덮었다. 책을 덮고, 책상에 엎드려,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나는 자는 체를 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너는 내 곁에 다가오지 않았지만, 뒤통수로 너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이 마주치면, 네가 입술이라도 벙끗하지 않을까. 그래, 이를테면 왜 그렇게 웃어, 라든지. 나는 감히 당신을 부르지도 못하고 어둠 속에 서 있다. 그만 몸을 떨었다. 아직 초가을인데도, 팔뚝이 훤히 드러나는 소매 아래가 찬 것 같았다. 당신이 밝아질수록 나는 어두워진다. 꾸욱 눈을 감았다. 네가 나를 바라보지 않기를 바라면서. 아니, 사실은. 나는 점점 겁쟁이가 되어간다. 네가 나를 오래오래 바라봐주었으면 좋겠다는, 멍청한 생각을 했다. 당신을 알기 시작한 후부터. 네가 내게서, 시선을 돌리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나의 소망은 현실이 되었다. 너는 정말로 내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올곧은 그 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내 이름을 부르고 싶어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했다. 내 목소리 닿을 수 없는 먼 곳의 이름이여. 눈이 마주칠 때마다, 너는 턱을 괸 그 얼굴로 씨익 미소를 짓고는 했다. 입술이, 움직였다. 차마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고. 청, 가람. 네 입술이 움직이는 순간, 얼굴이 확 붉어지는 남사스런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톡톡, 멀리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다. 너다. 네가 두드리는 것이다.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너는 여전히 나를 바라본 채로,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였다. 다만, 보고싶었다고나마 말하는 그대여. 내 이름 불러봐. 언제나 부르고 싶어 죽을 것만 같던 그 이름을, 네가 허락해주었다. 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벌리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벌어지지 않았다. 백건.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너의 이름이 참 달았다. 네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내 이름, 불러봐, 청가람. 네 말은 마법이다. 달콤하게 귓가를 울리며, 영영 벌어지지 않을 것 같던 입술을 벌렸다. 마법같은 네 목소리. 나는 가만히 입술을 벌려, 조용히 뇌까렸다. 백, 건. 그대는 정녕. 한발짝도 내려오지 않을 건가요.
너는 그렇게 내게로 다가왔다. 우리는 어느새 아침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고, 무료할 때 책상에 팔을 올리고 마주앉은 채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고, 너를 좋아하는 그 마음이, 마냥 커져가고만 있었다.
말하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멍하니 앉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지, 벌컥 소리를 지르며 내 멱살을 휘어잡던지, 아마 그 둘 중 하나가 아닐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런 고민을 하는 내가 우습고, 안타까웠다. 나는 가끔 일기를 썼다. 평범하게 시작하다가, 끝은 언제나 너였다. 너의 이야기였다. 오늘따라 네 눈이 참 예뻤더라, 샴푸를 바꿨다더니 그 향이 잊혀지지 않는다더라, 날이 갈수록, 너를 향한 내 마음이, 커져만 가더라. 우득. 손에 힘을 주었던 탓에, 얇던 샤프심이 부러졌다. 그래서 나는 또 네 생각을 했다. 네 생각을 하고, 다시 너를 떠올리고, 그리고 웃어버렸다. 너를 생각하면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 속은 언제나 너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네 웃음이 중심이었고, 네 목소리만이 또렷해서, 나는 그만 행복에 질식할 뻔 했다. 청가람. 문득 내 이름을 부르던 네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만 책상에 고개를 쳐박고 멍청한 웃음을 흘렸다. 너의 생각을 한 날은 이렇게나 행복하다. 속이 간질간질하고, 네 생각이 나고는 해서, 그만 또다시 깨닫고 마는 것이다.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다, 라고.
너에게 편지를 썼다. 안녕, 백건. 난 청가람이야. 진부하게 시작하던 첫 머리말. 나 사실 고백할 게 있어. 반전을 꾀하고. 나 사실 너를 좋아해. 직구를 날린다. 나는, 너를 좋아해. 입속에서 언제나 곱씹던 그 말. 너의 뒤통수에 대고 수천 번을 속삭이던 그 말.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도 너를 바라보며 조용하게 뇌까릴 그 말을. 그대, 이 편지 읽지 마세요. 그래요, 그대, 너. 네가. 이 편지를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미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가을이니 찬 물속에서 비로소 눈 맑아지는 열목어의 이야기도 아니고 단지 그대를 향한 편지니 그대 읽지 마세요. 그저 단순히 너를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다 그 그리움에 사무쳐 흘겨보는 짤막한 편지였다. 첩첩이 그리움 어쩌지 못해 견디다 못해 쓰는 편지니 그대 제발 읽지 마세요. 속안에 쌓인 너를 향한 그리움과 그 감정들을 담은 편지가, 잘게 찢겨졌다. 그대를 향한 단풍처럼 타오르는 이 마음을. 너를 향해 타는 마음을, 오늘도 너를 그릴 이 미친 듯한 그리움에 쌓인 마음을. 제발 부탁이니. 아, 그러니까. 백건. 만산홍엽같은 내 마음이니, 그대. 제발. 제발, 너를 바라보는 그 나의 시선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을 모른 척 해주기를. 잘게 찢겨진 종잇조각이 발치에 흔들렸다. 발등에 떨어진 종잇조각을 대충 흘리고는, 나는 다시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네가 보고 싶어서, 그만 보고 싶다고 말을 뱉을 뻔 했다. 너의 이름을 덧붙이며.
그 어느 날이었다. 책상을 가운데에 두고 너와 마주 앉아 있던 어느 겨울의 기억. 그 날은 시리도록 추웠고, 답지 않게 눈이 내렸고, 그리고 언제나처럼 교실이 황량하기만 했다. 나를 따라 일찍 교실에 도착하기 시작한 네가, 나를 바라보자마자 손을 흔들며 안녕, 하고 인사했다. 응, 안녕, 좋은 아침. 너를 따라 인사하며, 하고픈 말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널 좋아해. 속으로 고백을 삼키면서. 너는 익숙하게 제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내 앞에 다가왔다. 의자 하나를 끌고 앉아 가만히 내게로 시선을 주었다. 오늘따라 너의 눈이, 지독하게 예뻤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에, 나는 또 한 번 네게 고백을 했다. 물론 속으로 삼킨 말, 너는 듣지 못했지만. 네가 작게 입을 벌렸다. 입을 열면 하얀 김이 허공으로 흩어지던 저녁의 교실. 춥다, 그치. 네 조그마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춥다. 장갑도 끼지 않은 네 손이 새빨갛기만 했다. 커다랗고 새빨간 손바닥에 입김을 불며 추위를 견디는 네가, 마주 비벼대는 네 손이, 숨을 뱉는 네 입술이, 그저 눈에 담겼다. 그러기만 했다. 뜨거운 숨이 차가운 공기에 닿아 하얗게 변했다. 네가 숨을 쉴 때마다 그것이 퍼져가는 모양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뻤다는 생각. 하얀 김이 부서지며 허공에 번져갔다. 김이 나오는 네 입술을 바라보았다. 네 뺨이, 붉게 변했다.
“뭘 그렇게 봐?”
뭘 보느냐고 네가 묻자,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너.”
라고 대답하고 말았던 그 날.
시간이 멈추고, 네가 멈추었다. 나를 바라보던 눈이 느리게 꿈뻑였고, 계속해서 부벼대던 손이 느리게 움직였다. 나는 숨을 죽였다. 숨을 죽이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야로, 나를 멀거니 바라보는 네 멍청한 얼굴이 보였다. 스위치를 누르는 선풍기의 날개가 돌아간다.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네가 어떤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수족관에는 물고기들이 떠다니고. 내가 그만 참을 수가 없어졌다는 것. 지구의 어느 끝에서는 파도를 타는 사람들이 있다. 도망치고 싶다. 도망쳐버리고 싶다. 이대로 네게 등을 돌려, 영영 네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 발은, 쉽사리 떨어지지를 않았다. 녹차 위에 띄워놓은 얼음이 녹고 있다. 야. 네 목소리가 들리자, 그것이 무엇의 신호라도 되듯, 나는 그대로 네게서 도망쳐버렸다. 선풍기를 튼 채 잠이 들면 질식사한다고도 한다. 숨이 막혔다. 숨이 막혀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더 이상 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어. 미안하고, 미안해서, 나는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으리라 결심을 했다.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알 수 있었다. 너로구나. 나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네게 오는 전화를 받을 자신이 없었다. 너는 몇 번이나 거듭해서 전화를 걸었다. 미적거리며 손을 뻗었다. 여전히 울리는 전화가, 마치 나를 다그치는 듯 했다.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다. 그래서 어쩔 수가 없었다. 마치 네가 내 귓가에 대고 받아, 라고 화를 내는 것 같아서, 그만 전화를 받아버렸던 거다. 그 사람의 눈빛, 그 사람의 목소리, 그 사람의 몸짓. 딸칵. 청가람. 나를 부르는 네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그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걸어두었던 너의 붉고 상기된 얼굴, 이제 문득 손을 놓아야 할 때. 나는 입을 다물었다. 다물었던 탓에, 너는 몇 번이고 내 이름을 되불러야만 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의 말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나는 그것을 견딜힘이 없어서, 그대로 무너져버렸다. 청가람. 내 이름을 부르는 너의 목소리가, 그저 달기만 해서, 그게 너무 야속했다. 쓰라리고 떨리고 화끈거리는 봄밤의 꿈같은 것.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너의 목소리를 듣기만 했다. 너의 목소리를 들으며, 보이지도 않을 고개를 끄덕이며, 너의 이름을 부르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참아내었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얘야. 울고, 울고, 아주 오랫동안이나 울었다. 너 또한 그랬다. 내 이름을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르며, 거듭해서 말했다. 그냥.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차마 뱉어낼 자신이 없었다. 네게 수백 번 편지를 썼고, 수천 번 네 꿈을 꾸었다. 너를 바라보던, 연민과도 같던 나의 감정은, 어느새. 그냥 사랑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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